어느 책에선가, 아마도 보드리야르는 해프닝과 텍스트를 구별하였다. 하나의 사건이라 할지라도, 해당 사건이 발생하는 그 순간으로서의 해프닝과, 그 순간이 지난 후 해석의 대상이 된 결과로서의 텍스트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그러니까 동일한 사건을 해프닝의 순간과 텍스트의 두 측면으로 나눈 셈이다. 보드리야르는 이것을 9.11 테러에 대한 해석을 위해 사용하였지만, 평범한 인간의 삶에서, 이것은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문구이기도 했다.

미셀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의 주인공 조엘은 도피를 해야 한다. 자신의 기억을 지우려는 박사로부터 자신의 기억, 즉 사랑에 대한 기억을 지켜내기 위해서이다. 이 도피의 방식은 무척 흥미롭다. 연인 클레멘타인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었던 기억들을 지우려는 박사로부터 도망다니는 과정은 처음엔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을 지키는 방향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첨단의 기술력을 갖춘 박사에게, 이런 시도는 무력하다. 결국 조엘은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을 지키기 위해, 클레멘타인이 존재하지 않았던 순간들을 향해 달린다. 조엘이 아주 어렸던 시절, 즉 자신의 삶에 클레멘타인이라는 존재가 들어서기 이전의 어느 순간들에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도착한다. 조엘은 자신이 여성을 느꼈던 순간들을 찾아다니며 그 기억에 클레멘타인을 덧붙인다. 악동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죄 없는 어린 새를 죽여야 했을 때, 조엘을 위로해주었던 어떤 소녀나 어린 조엘에게 성적인 판타지를 느끼게 했었던 이웃집 아주머니의 얼굴에 클레멘타인을 덧붙인다. 조엘이 이렇듯 과거를 향해 달리는 순간들은 조엘이 클레멘타인을 어떻게 사랑해왔는지를 암시하는 일련의 과정이 된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사랑했던 것일까, 클레멘타인에게서 발견한 가면을 사랑했던 것일까. 혹은 조엘은 클레멘타인에게 가면을 씌우고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클레멘타인을 사랑했던 것은, 조엘이 아니라 조엘의 기억이었던 것은 아닐까.

조엘은 자신에게 여성으로 각인되었던 이미지들과 느낌을 클레멘타인에게 원했다. 즉 꿈속에서 클레멘타인은 그 사람들의 가면이 되지만, 현실의 사랑 속에서 조엘은 클레멘타인에게서 그들의 가면을 찾고자 했던 셈이다. 조엘이 기억을 지우려는 사람들을 피하면서 만나게 되는 더 먼 기억들은 기억에 대한 일종의 성찰을 안겨 준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이라는 토대 위에 새로운 삶과 사랑을 구축하기 마련인데, 조엘의 사랑이란 과거의 사랑 위에 세워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건물이었던 셈이다. 조엘이 사랑했던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해프닝으로서의 클레멘타인이 아니라, 조엘이 알고 있고 받아들이고 있는 과거의 어느 여성, 혹은 그 여성을 받아들이는 조엘에 반응하는 클레멘타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반성과 성찰은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자신의 기억이 조작당했음을 인지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혹은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 힘을 발휘한다. 이미 클레멘타인과의 사랑에 대한 특정한 기억을 남겼고, 그 기억은 지워야 할 정도로 힘겨운 것이었지만, 새로운 사랑이란 단순히 과거의 기억에서만 뿌리를 내려야 생존하는 미약한 것이 아니다. 유년 시절의 기억도, 클레멘타인과의 첫 번째 사랑과의 기억도, 두 번째 사랑을 시작하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이 되지는 않는다. 오직 지금 눈앞에 있는 클레멘타인, 그녀와 나누었던 하룻밤의 교감과 마음이 새로운 사랑을 가능케 한다. 사랑은, 이런 측면에서 전적으로 해프닝의 영역이다.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사랑에 대한 이러한 낭만적인 해석은 물론 현실에서 그다지 지지를 받지는 못한다. 사랑은 무척 낭만적으로 신비화되기도 하지만, 냉소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극단적으로 누군가에게 사랑은 호르몬의 작용에 의한 결과일 뿐이다. 영화 속의 박사도 기억을 뇌가 해내는 작용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뇌를 탐구한다. 하지만, <이터널 선샤인>을 천천히 보게 되면, 사랑에 대해 미약하나마 변호를 할 수 있게 된다. 기억은 의식과 무의식을 가로지르는 어느 곳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의식의 영역에서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고, 무의식의 영역에서 도무지 우리가 넘어서지 못할 금기와 한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은 단지 기억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사랑은, 기억을 넘어 마음과 영혼에도 흔적을 남긴다. 해프닝에 대해 뇌는 기억과 해석의 방향으로 작용하지만, 마음은 ‘감정’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균형 잡힌 사랑이란 이 둘을 적절히 갈등시키며 얻어낸 조화일 것이다.

사랑에 대한 마음의 작용은, 과연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아마 <이터널 선샤인>은 이 질문에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 같다. 사실 영화 속 모든 사건의 기원은, 조엘의 기억을 지우는 과정에서 문득 찾아온, ‘기억을 잊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아니었던가. 이런 마음을 딛고, 사랑과 기억은 전진한다.

문득 영화를 보다, <초속 5센티미터>라는 애니메이션에서, 오랜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 소녀와의 첫 키스를 경험한 소년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던 말이 떠올랐다. 소녀와의 첫 키스를 하는
“그 순간, 영원, 마음, 영혼 같은 것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