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 없는 사랑은, 뜨겁고 악랄하며 지루한 괴물을 닮았다. 그리스 신화에 켄타우로스라는 반인반마의 존재가 있다. 에이오네우스가 있고, 그의 딸 디아가 있다. 디아를 아내로 맞이한 익시온은 납폐금이 아까워 에이오네우스를 죽이고 결국 쫓기는 몸이 된다. 익시온을 불쌍히 여긴 제우스가 익시온을 올림푸스 산에 숨겨주려 했으나, 익시온은 헤라를 꾀어내어 불륜을 저지르려 한다. 이에 분개한 제우스가 헤라를 빼돌리고 구름으로 헤라를 만들어 익시온에게 안겨준다. 익시온과 구름 헤라가 정을 통해 낳은 존재가 켄타우로스다. 제우스는 익시온을 불의 수레바퀴에 묶어 영원히 회전하는 형벌을 내렸고, 결국 익시온은 영겁의 죄로 신음하는 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익시온은 사랑을 할 줄 아는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어느 사랑의 연대기>는 치졸하고 병약한 불륜의 무기력한 끝을 보여준다.

오죽 영화 이미지가 없으면 켄타우로스 이미지를...

젊고 아름다운 파올라는 부자와 결혼했다. 사고 싶은 것을 사고 입고 싶은 것을 입을 수 있기에 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이다. 그러나 어느 날, 파올라의 남편은 한 장의 사진을 발견하고, 그 사진으로부터 파올라의 과거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그리곤 대개의 치정영화들이 그런 것처럼 사립탐정을 고용해 파올라의 과거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사립탐정의 시선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파올라의 과거에 분명 미심쩍은 부분이 있음을 암시한다. 파올라와 파올라의 단짝 친구였던 한 소녀와 이 소녀의 남자친구였던 귀도 사이에 어떤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 이후 소녀는 죽었고 파올라는 자신의 고향을 떠나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영화가 재미있어지는 부분은 이 대목부터이다. 사립탐정이 여기저기 탐문하고 다니는 사이, 파올라의 친구는 귀도에게 누군가 파올라와 귀도의 뒤를 추적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고, 이 편지가 계기가 되어 파올라와 귀도는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오래된 치정영화처럼 이 둘의 불륜이 시작되고 이들의 과거도 서서히 드러난다.

분명 파올라와 귀도는 서로 사랑했었다. 그들의 사랑은 무척 오래된 것이어서 파올라와 파올라의 친구와 귀도가 어울려 다녔던 그때부터 이미 그들은 사랑하고 있었다. 파올라는 친구에게서 귀도를 빼앗을 자신도 없고 귀도는 자신의 여자친구를 버리고 파올라와 사랑을 시작할 염치가 없었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그냥 풋풋한 청소년들의 짝사랑 이야기 정도로 끝났을 텐데, 안토니오니 감독은 이 둘보다 더 염치가 없었다. 어느 날 사고로 귀도의 여자친구가 죽게 되면서 파올라와 귀도는 공범의식을 공유하게 된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을 때 그곳에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파올라와 귀도는 그것을 알아보았지만 그 짧은 순간 자신의 여자친구가, 자신의 단짝 친구가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에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친구를 말리지 않았다. 파올라의 단짝친구이자 귀도의 연인이었던 소녀는 그렇게 죽었다. 이야기가 이렇게 전개되면, 결국 둘은 서로 외에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된다. 세상의 그 누구도 모르는, 단지 둘만 아는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보다 강한 것은 없다.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다시 사랑을 시작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파올라에게 남편이 있다. 결국 오래된 치정영화의 문법대로 둘은 자신들의 사랑을 위해 파올라의 남편을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사랑이란, 비슷한 공범의식에서 출발하게 되는 것 같다. 우리 둘만 이해할 수 있고 우리 둘만 알아볼 수 있는 서로의 모습이 있을 것이라는 환상 같은 것 없이 사랑이 지속되기란 힘들어 보인다. 그리고 이런 사랑이 없다면 삶 자체가 지속되기 힘들다. 비록 그것이 환상 속에 그대라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믿음만으로도 가끔 삶은 살아볼만한 것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지지자의 힘에 안주하는 사랑과 이런 지지자의 힘을 바탕으로 성숙하는 사랑 사이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지지자의 힘에 안주하게 되면, 그 사랑은 유아적 사랑에 머물게 된다. 확장되지도 깊어지지도 않고 그저 세계로부터 도피하려는 사람들의 지리멸렬함으로 귀결되는 사랑이 되어버린다. 이를테면 파올라가 사랑하는 방식은 지리멸렬하다. 단짝 친구의 애인을 좋아할 때는 친구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들의 사랑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 지금의 남편과 결혼해서는 경제적인 안락함과 풍요로움을 안겨주는 남편의 그늘을 벗어날 용기가 없다.

<어느 사랑의 연대기>가 일반 치정영화와 다른 측면이 있다면, 치정영화의 일반적인 서사라인을 지켜오다 마지막에 와서 살짝 방향을 바꾸어버린다는 점에 있다. 이를 테면, 파올라와 귀도는 공모해서 파올라의 남편을 죽여버리기로 결심하지만, 이 둘이 맞닥뜨리는 것은 거사 직전 사고로 죽어버리는 남편의 모습이며 자신들의 초상이다. 이것은 그들의 원죄의식을 자극한다. 단짝친구와 애인을 죽이지는 못하고 죽게 만들었던 그 상황이 다신 반복된 셈이다. 그들의 사랑은 언제나 비겁했으며, 그들의 비겁함은 비록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죽음으로 귀결된다. 세상의 누구도 이들의 죽음에 대해 파올라와 귀도에게 책임을 묻지 않지만, 이 둘은 덜어낼 수 없는 죄의식을 짊어지게 된다. 마치 익시온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영겁의 죄의식을 지게 된다. 이 죄의식은 다른 이들과의 사랑이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그들만의 사랑의 조건이며, 동시에 그들이 서로를 떠나도록 만드는 조건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서사라인에 대해 감독이 지니는 서정적인 태도이다. 감독은 이 영화에서 서정을 삭제했다. 즉 파올라와 귀도의 사랑은 아름답게 채색되지 않는다. 비록 이들이 자신들의 사랑하는 방법 속에서 영원에 이르는 순환을 반복하더라도 이들의 사랑은 고행으로 승화되지도 사랑으로 미화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이들이 사랑했던 방식, 그 방식만큼의 업을 지고 살아가게 된다. 1950년에 만들어진 영화인데, 어째 사람이 사랑하는 방식에는 큰 변화가 없는 것 같다. 사랑 앞에 선 젊은 연인들아, “대담하라, 더욱 대담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