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눈과 바람이 빙하로 결빙되어지기까지, 그리고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 산처럼 큰 빙하를 이룰 때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빙하는 산처럼 고요하고 웅장하다. 그러나 그런 빙하도 일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가장자리부터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던 빙하는 수천 년 간 품었던 시간을 비명처럼 내지르며 주저앉는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의 은유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것을 이루려고 노력한다. 신이 마련해준 적지 않은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얻을 만큼 얻고, 이룰 만큼 이루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우연한 사고 하나로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줄리앙 슈나벨 감독의 <잠수종과 나비>는 우연과 기적, 그리고 인간의 삶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엘르의 편집장 장 도미니크 보비도 그러했다. 장은 잘 나가는 작가이자, 사랑스런 아이들의 아버지이며, 예쁜 아내의 비공식적인 남편이자 멋진 애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많은 모델과 예술가들에게 둘러싸인 그의 삶은 진정 화려하다. 그는 축복받았다. 그러나 새로 산 스포츠카에 아들을 태우고 드라이브를 떠난 어느 날 장은 갑작스레 전신마비를 당한다. 입은 돌아갔고 눈은 전신마비를 당하던 순간에 나무를 노려보던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록트 인 신드롬, 희귀 질환이라는 이 병이 장을 찾아온 이유를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0여 일 간의 의식불명 상태에서 깨어난 장에게 의사들은 생명을 건진 것이 다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장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장이 록트 인 신드롬에 걸리는 순간을 영화의 마지막에서 보여준다. 이를테면 관객들은 장이 왜 전신마비를 당했는지 알 수 없다. 장 스스로도 궁금해 한다. 그러나 장은 기억해내지 못한다. 거대한 차 사고가 났던 것일까? 강도에게 급습을 당한 것일까? 관객과 장은 어떻게 장이 전신마비를 당했는지 궁금하다. 무언가 운명처럼 찾아온 사건이 돌연 그를 무대에서 끌어내린 것인가? 그러나 영화의 말미에 밝혀진 대로, 장이 전신마비를 당한 것은, 그냥 그렇게 되어진 것이다. 그것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고, 누군가의 의도로 인한 것도 아니었다. 세상이 우연으로 직조된 거대한 그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간혹 잊고 산다. 아무 관계도 없고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는 인간계의 삶이란, 그 자체로 잠수종에 갇힌 신체와 다를 바가 없다. 장의 마비는 단순히 장의 신체적 구속 상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노출되어 있는 덧없음과 우연의 세계에의 예속을 더불어 의미한다. 누구에게나 아무런 이유 없이 불행이 찾아온다는, 예측할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이러한 삶에서 인간은 희망을 가져야 할까?

장의 눈 키보드

록트 인 신드롬에 걸려 실의에 빠진 장은, 어느 날 깨닫는다. 자신의 몸은 비록 잠수종에 갇힌 것과 똑같은 신세이지만, 그에게는 잠수종을 벗어날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나비의 양 날개와 같은 기억과 상상이다. 기억과 상상을 날개 삼아 장은 신체의 무력함을 넘어 새로운 삶의 지평을 향해 날기 시작한다. 그는 소설을 쓴다. 오직 왼쪽 눈만 움직일 수 있는 상황에서 그는 소설을 쓴다. 간호사가 순서대로 읽어주는 알파벳에서 자신이 선택할 알파벳이 나오는 순간 그는 눈을 깜박인다. 간호사는 그 알파벳을 받아 적고, 다시 순서대로 알파벳을 읽는다. 이런 식으로 한 단어를 완성하기 위해 몇 분이 걸릴지 모르는 단순함이 반복된다. 그러나 이런 단순함은 우리가 일상에서 겪게 되는 지루함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이 내팽개쳐진 다양한 무료함과 덧없음을 천천히 걷어내는, 기도와 같은 숭고함이 이 단순한 속에서 발견된다. 이렇게 15개월 동안 20여만 번 눈을 깜박여 13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남기고, 책이 발간되고 일주일 후 그는 죽는다. 잠수종에 갇힌 육신을 덜어내고 온전히 자유로운 세계로 걸음을 옮긴다.

이즈음에 이르러 생각하게 되는 것은 기적의 존재이다. 전신마비 환자가 130페이지의 책을 내었다. 이것은 기적인가? 그것은 기적이라면 기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계에 어디쯤에서 인간을 조롱하는 우연 같은 종류의 기적이 아니다. 장의 주위에서 장의 회복을 염원하는 사람들이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어 완성한, 정당한 사건일 뿐이다. 헌신적으로 장의 회복을 돕는 간호사들과 의사들, 그리고 장에게 책을 읽어주는 친구, 장과의 우연적 만남으로 장시간 테러범들에게 억류되었던 한 백발 노인의 방문, 어느새 장의 정신적 친구가 되어버린 장의 아버지, 사랑하는 아이들과 아이들의 엄마, 애인, 그리고 대필 조수. 이들은 모두 장의 주위에서 그의 삶을 지지하고 끌어안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이 지닌 유머가 이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태도를 만들어낸다.

파괴적이고 잔인하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 나약한 인간의 시선으로 우리의 삶을 다시 되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한쪽 눈이 꿰매지고, 오직 한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아직 한 눈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팡세에서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허무에 도달하는 데에도 전체에 도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능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