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많은 사람들이 리얼리즘 영화라 부르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영화가 나타났다. 60번째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크리스티안 문주 감독의 루마니아 영화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세간의 평 이상으로 스크린에 담아야 할 것들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 작품으로 보인다. 스토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독재정권 하의 루마니아에서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대생과 그녀의 친구가 불법으로 낙태를 시술받는 과정이다. 낙태가 불법으로 처벌받는 시대의 하룻밤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낙태라는 소재가 등장하는 타이밍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30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관객들은 이 영화가 낙태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감정의 진행에 있어 사건의 분화가 발생한다. 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이미 영화가 시작한 상태로부터 낙태라는 소재를 알고 있었지만, 관객은 뒤늦게 낙태라는 소재를 알게 되기 때문에 감정의 격차가 생긴다. 낙태라는 소재를 접한 순간 관객의 감정이 기대하게 되는 것은 낙태를 둘러싼 인물들의 감정이다. 그것은 슬픔과 연민, 괴로움과 죄의식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의 인물들은 낙태라는 소재가 밝혀지는 타이밍에는 아랑곳없이 본래부터 자신들이 취하던 태도를 유지한다.

한마디로 그들에게서는 죄의식보다는 비참함과 두려움이 앞선다. 그러니까 낙태를 한다는 슬픔보다는 못된 베베에게 치욕을 당해야 한다는 비참함이, 태아를 버렸다는 죄의식보다는 태아를 지니고 있다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사적이며 모성적이고 윤리적인 감정을 앞서는 비참함과 두려움은 시대 앞에 인간이 얼마나 나약해질 수 있는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낙태를 슬퍼하는 것보다 낙태를 들키지 않는 것이 더욱 절박한 시대에 그들은 살고 있다. 이러한 설정은 철저하게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만 강조해서 보여주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조금만 자세히 영화를 본다면, 이 영화는 많은 부분 감독의 의지가 분명하게 개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화를 빛낸 세 배우들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롱테이크와 핸드헬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정작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것을 표현하는 매체는 사운드와 빛이다. 영화의 사운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리되고 있다. 영화의 화면에서 등장해야 하는 소리들과 오틸리아의 내면을 통해 강화 되는 소리가 있다. 예를 들어, 호텔에서 베베가 불법시술을 앞두고 그의 도구를 만지작거리면서 등장하는 건조하고 날카로운 금속성, 오틸리아가 태아의 사체를 들고 거리를 방황할 때의 사이렌 소리, 어느 건물의 쓰레기장에 태아를 버릴 때 스윽 하고 관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 태아의 사체가 바닥에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들은 오틸리아의 불안과 두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최대한 인위적인 조명을 배제한 것으로 보이는 이 영화는 오틸리아가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더라도 별다른 장치를 사용하지 않고 카메라만으로 그녀를 따라 간다. 화면이 어둠으로 바뀌더라도 그것을 감수한다. 그리고 이것은 밤과 시대에 대한 거대한 알레고리를 만들어낸다. 만약 이 영화가 핸드헬드를 고집했더라도 조명을 인위적으로 사용했다면 현재와 같은 수준의 리얼리티 같아 보이는 화면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다양한 방식을 통해, 감독은 그 시대를 고발하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억압과 무기력, 관료주의와 특권, 가난과 구속과 피로가 엇갈렸던 시대는 슬픔에게조차 온당하게 들어설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식사

이러한 의지의 연장선에서, 영화의 마지막 씬은 대단히 강력하며 상징적이다. 4개월, 3주, 2일 그리고 한 끼의 식사. 막 아이를 지워버리고 태아의 시신을 어딘가에 버리고 온 그들이지만, 살기 위해 어쨌든 먹어야 한다. 이 영화가 시작하고 최초의 식사가 시작되려는 순간이다. 하지만 막 아이를 지워버린 그들에게 짐승의 내장으로 이루어진 식사가 건네진다. 차마 칼과 포크를 들지 못하고 다른 메뉴를 찾기 위해 메뉴판을 뒤지지만 쉽게 선택할 수 있는 메뉴가 없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난다.

우리는 전쟁의 시대에 연을 날리기도 했고, 독재의 시대에 온 가족이 첫 차를 타고 나들이를 나서기도 했다. 시대에 붙은 이름과는 별개로 삶이라고 하는 시간은 제 나름의 무늬를 또박또박 새긴다. 때로 이것은 위안이 된다. 인간의 삶이란 시대라는 기계를 돌리는 톱니바퀴에 국한되지는 않을 많은 사연을 담을 수 있는 터전이다. 그래서 언제나 희망(에 대한 의지)이라는 것도 있어왔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 섬뜩해진다.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은, 그런 의지를 빼앗겼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잊고 산다. 그리고 지금의 시대도 누군가에게는 이렇듯 답답하고 무기력한 어떤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