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개 무료함 속에서 살아간다. 무료함이란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딱히 하고 싶은 일은 없는 상태를 뜻하지 않나 싶다. 그러니까 무료함이란 할 일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때 되면 밥을 먹어야 하고 비가 오면 빨래를 걷어야 한다. 졸음이 오면 자야 되고 심심하면 놀아야 한다. 해야 할 일들은 많고,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매순간 ‘존재되어진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우리에게 특별한 사건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특별한 사건이란 존재되어짐의 상태를 ‘존재함’의 상태로 바꾸어내는 계기, 혹은 그런 우연과의 조우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특별한 사건이라고 해서 그것이 특별한 방법으로, 소설처럼 혹은 영화처럼 찾아오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어느 때인가 우리의 삶을 비탈길에 내려놓는 질문들과 맞닥뜨리곤 한다.

대개 다케시 영화의 시작점도 이러한 무료함이다. 동네에서 양아치 짓을 하고 다니던 복학생에게도, 사람을 크레인에 매달아 물에 담그며 하품을 하는 야쿠자에게도 무료함은 찾아온다. 무료함이라는 지평 속에서는, 우습게도 만인이 평등하다. 이 때문에 다케시의 영화에서 어떤 윤리적 결정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의 세계는 무료함과, 무료함 속에 포함된 만담이 뒤섞여 천천히 흐른다. 이 흐름 속에서 선과 악은 의미가 없다. 그리고 제도적 결핍과 법도 의미가 없다.

어린 마사오도 마찬가지다. 소년이라면 마땅히 즐거워해야 할 방학이 되었지만, 마사오는 즐겁지 않다. 마사오에게 방학은 친구와 학교, 축구교실로부터 고립되는 시간이다. 유일한 동거인인 할머니는 일을 나갔고, 마사오는 홀로 방에 남겨진다. 친구들은 가족들과 함께 바다든 어디든 모두 떠나갔다. 홀로 남겨진 마사오에겐 고민이 있다. 마사오는 엄마가 보고 싶다. 아빠는 일찍 돌아가셨고, 엄마는 돈을 벌기 위해 먼 곳으로 갔다. 어린 아이들의 생각은 간단명료하다. 마사오는 방학 둘째 날, 엄마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리고 이 여행에 이웃집 야쿠자 아저씨가 동행으로 따라나선다. 다케시 영화의 인물들이 그러하듯, 마사오도 떠난다.

무료함의 상황 속에서, 떠남이란 필연적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찾아나섬 이다. 목적은 있으나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는 떠남, 만난다는 기약은 없으나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만으로 시작되는 떠남은 종국적으로 자기(the Self)를 만나는 과정으로 귀결되는, 순례이다. <기쿠지로의 여름>은 마사오와 야쿠자 아저씨가 함께 나선 순례의 여정에 대한 기록이다. 이들은 경륜장에 가서 돈을 잃고, 호텔에 들어가 수영장에 거꾸로 처박히고, 택시를 훔쳐 달아나다 택시를 고장 낸다. 히치 하이킹을 하기 위해 남의 차 타이어에 빵구를 내고 도망가는 그런 식의 순례이다. 버스가 오지 않는 오래된 정류장에서 비를 맞으며 밤을 새우고 어디에서든 돈을 강탈하는 이들의 여행은 목적지를 향한 과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길과 찾아나섬, 헛발을 내딛는 유랑 이 모든 것들이 목적이다. 이들에게 원래 예정되었던 목적지는 결국 허상이었다. 마사오가 찾아간 엄마는 이미 다른 아버지와 다른 아이들의 아내와 엄마가 되어 있다.

중요한 사건이란 이런 식이다. 예정된 순서를 밟지 않지만, 결국은 찾아오고야 만다. 할머니가 엄마를 찾으러 가지 말라고 말렸을 때에는 다 그럴 법한 이유가 있다. 비밀의 문을 여는 아이는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 어린 마사오는 결국 자신이 엄마조차 없는, 정말 혼자인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무료함의 상황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이런 치명적인 결과, 존재가 흔들리는 사건을 안겨준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란 이런 방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최소한 우리의 삶을 떠나 다케시의 영화는 이러한 상태로 끝나지 않는다. 다케시는 삶은 시시한 것이라고 말하는 시시한 어른도 아니고 삶은 즐거운 것이라고 말하는 슬픈 어른도 아니다. 삶에는 즐거움과 슬픔이 함께 있고, 떠남은 기대와 실망 모두를 등에 매고 나서는 여정이다. 야쿠자 아저씨의 위로가 시작된다. 히피 폭주족에게 방울천사 인형을 뺏어 마사오에게 주고, 근처 축제에 마사오를 데리고 가 멋진 인형을 선물로 안겨준다. 대머리 착하게 생긴 아저씨와 히피 폭주족을 불러 마사오를 위한 캠프를 떠난다. 그들은 다시 바다에 모인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가 서로를 즐겁게 해주는 과정을 통해, 이들은 결국 순례의 목적지에 도달한다. 존재라는 질문 너머에 있는 것, 그것은 매우 어렴풋하고 쉽게 만져지지 않지만 그들은 거기에 도달한다.

엄마를 찾아 나섰던 마사오는 기쿠지로라는 야쿠자 아저씨를 얻었다. 그리고 마사오를 보살펴주려는 세계로부터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웠다. 이제 마사오는 간혹 엄마를 그리워하겠지만, 그것이 자기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될 것이다. 누구든 지고 살아가는 결핍을 이제야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 결핍만으로 재단되지 않는 삶의 실체라는 것을 향해 조금씩 걸어나갈 수 있게 된다. 마사오의 동네로 마사오를 데려온 기쿠지로는 마사오를 혼자 보낸다. 이제 마사오는 혼자 갈 수 있다. 집을 향해 달려가는 마사오를, 기쿠지로는 먼 곳에서 바라본다. 영화의 첫 장면은 이 마지막 장면의 연장이다. 마사오는, <키즈 리턴>의 그 녀석들이 그러했듯 다시 최초의 장소를 향해 웃으며 달려간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을 보며 다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요, 다케시. 당신은 참 좋은 어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