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세 가지의 성이 있다. 남성, 여성, 그리고 어른이 된 남성.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의 <주노>를 보고 하게 된 생각이다. 그냥 느낌에 불과하지만 여성은,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일관된 면을 가지고 있다. 여성이 삶을 껴안는 방식은 실수투성이이고 나약하며 때로는 엉뚱하기까지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단호하다. 여성 사회에서 그들이 공유하는 유대감 같은 것을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느껴본 적이 있는데, 그들은 때로는 불같고 때로는 물같다. 어쨌든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 그들이 공간을 차지하는 방식은, 손에 잡히지 않으면서도 일렁이고 너울거린다. 가끔은, 그들이 곧 세상 같다.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떼를 지어 뛰어다니는 소년들의 모습은, 어찌 보면 그들이 정자였던 시절부터 학생, 군인을 거쳐 어른이 되기 전까지 늘 한결 같다. 그들은 언제나 무엇을 위해 준비 중이며, 준비는 그들의 의지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지를 완성시켜줄 대상을 만나는 순간 준비가 끝나진다. 묵직한 주먹을 휘두르는 방법은 배웠지만 용기를 가지는 법은 영영 배우지 못하는, 그런 남성 말이다. 피터팬이나 후크 선장이 이런 케이스에 속한다. 그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영원히 늙지 않는 네버랜드에서 자기들끼리 싸움질이고 고민질이다. 반면 어른이 된 남성도 있다. 이른바 준비가 끝나고, 준비의 다음 단계를 경험해본 남성. 이들에게는 남성이라는 칭호보다는 어른이라는 칭호가 더 어울린다. 역시 나이와는 무관하다.

모든 이야기는 의자에서 시작되었다.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마시듯 오렌지 주스를 벌컥벌컥 마시던 주노는, 세 차례에 걸친 테스트 끝에 자신이 임신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16세 주노에게, 비록 원치는 않았지만 임신은, 날벼락 같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물론 당혹스럽지만, 임신 자체는 기적이기도 하고 삶이 안겨준 선물이 될 수도 있다. 영화는 주노의 임신에 대해 매우 다양한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주노의 친구들, 아버지, 새엄마, 남자친구, 주노 자신에게 임신은 조금씩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주노의 결심을 존중한다. 당사자보다 더욱 소란을 떨며 당사자를 실제보다 더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짓 따윈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주노와 함께 입양부모의 집에 방문해주고, 새엄마는 주노와 함께 병원에 다닌다. 주노의 친구들은 주노의 사례를 마치 예습하듯 신기해하고, 남자친구는 저절로 이끌림을 당한 듯 주노의 출산을 예감하고 달려온다. 이 모든 환경은 실수를 실수에 걸맞는 자리에 올려놓는다. 실수는 재앙이 아니다. 실수는 실수이고, 아기는 아기이다.

배가 아픈 엄마와 가슴이 아픈 엄마

물론 이 영화에서 판타지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영화가 단순히 보기 좋으라고 만든 촌스러운 판타지가 아닌 이유는, 이 모든 판타지들이 명백한 주노의 결단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주노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고, 주노는 그 답을 안다. 낙태는 싫고, 미혼모도 싫고, 결국 입양을 선택한다. 입양이 생각보다 힘겨운 과정임을 인지시키는 새엄마에게 주노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이를 테면 주노는 입양이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안다. 삶에서 언제나 최선의 것만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주노가 스스로 만들었던 실수, “다른 10파운드의 무게(주노의 뱃속에 있는 아기)” 같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 가방을 들어줄 수는 있겠지만, 스스로 선택한 10파운드는 주노의 몫이다. 아이를 낳고, 남자친구에게 안겨 눈물을 흘리는 주노의 모습 속에서 10달의 시간을 단순히 즐겁고 유쾌하게만 지내지 못했던 주노의 내면과 마주하게 된다. 이제 주노의 뱃속에 있던 아기는 주노의 아이가 아니다. 그러나 주노는 그 10달을 아기와 함께 보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주노가 자신을 대신할 아기의 부모를 찾는 과정이다. 멋진 입양부모를 찾아냈고, 심지어 아기의 아빠가 될 사람은 주노와 너무도 잘 어울린다. 그러나 결국 그는 어른이 되지 못한 남자에 불과하다. 여전히 준비 중인 그는, 앞으로도 준비 중일 것이다. 준비중 2학년 쯤 되는 그가 준비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까지는 한 세월이 걸릴 것 같다. 주노는 홀로 남은 바네사에게 아기를 맡긴다. 대관절 사랑이란 게 무엇인지, 부모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까마득한 세월이 걸려서야 알 수 있을 것 같던 문제는, 수학 문제와 비슷하다. 대개 답은 -1, 0, 1이다. 풀이가 길다고 정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주노의 용기를 칭찬해야 할까, 라고 생각을 해봤다. 필요한 것은 주노의 용기에 대한 칭찬이 아닌 것 같다. 주노의 행동을 용기라고 인식하게 만드는, 이 사회가 좀 미련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영화에 대해 표절 논란이 있다. 소재가 비슷하고 주인공의 이름이 비슷해서 이 영화가 표절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에 성경과 세익스피어의 표절이 아닌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