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특징을 설명하는 개념 중,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 중 하나가 ‘신파’다. 신파라는 단어는 자주 사용되지만, 그것에 대한 엄밀한 정의나 합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신파’를 거칠게 설명하자면, ‘슬픔 앞에서 주저 앉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슬픔과 고난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그것에 취하고 그 속에서 머무르며 부려대는 청승맞음, 그것이 신파다. 신파로 흐르는 영화를 보다보면, 그만큼 세상에는 극복하기 힘든 고난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알 것도 같다. 왜 신파스러운 영화들이 자꾸 나오는지를. 처량맞음은 자신이 스스로를 위로하는 하나의 태도가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덕분에 신파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숭고함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숭고함은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피어나는, 그것을 돌파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빚어낸 감동을 일컫는다. 영화 <...ing>는 신파와 숭고함이 섞여 있다. 신파와 숭고함이 섞이며, 서로의 농도를 낮춘다. 신파이되 청승맞지 않고 숭고하되 장엄하지 않다. 삶의 소소함과 그것을 알갱이로 만들어내는 노력이 가지는 의미를 깨닫게 하는 영화다.

내가 이미숙이었으면...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두 모녀가 있다. 모녀라기보다는 친구에 가깝다. 엄마는 시한부 인생인 딸을 위해 친구가 되어주고, 딸은 혼자 지내면서 아빠를 그리워하는 엄마를 위해 친구가 되어 준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떠나면 미안해지는 관계, 그러나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서 벗어나 다른 관계를 맺어가길 바라는 관계가 이 둘의 관계이다. 이 둘의 관계를 질적으로 유지시키고 변화시키는 것이 있다. 엄마는 딸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딸은 자신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을 모른다. 엄마는 딸이 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얻는 고통을 보다 못해 치료를 거부한다. 모진 엄마라는 소문은 두렵지 않다. 딸의 인간다움과 행복, 그것을 맞바꿀만한 것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이렇게 커다란 비밀을 안고, 둘은 자매처럼, 친구처럼 살아간다. 그리고 어느날 이 둘의 관계 속에 아랫집 남자 영재가 등장한다.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영재는 딸 민아를 보기가 무섭게 작업을 시작한다. 이 작업은 민아에게도, 민아의 엄마 미숙에게도 소소한 즐거움을 준다. 적극적이며 활발한 영재와 속 깊은 고등학생 민아는 조금씩 사랑을 키워간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이 깊어가려 할 즈음, 민아는 자신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비밀을 알게 된 사람은 민아와 미숙, 둘이 되었다.

영화 <...ing>는 비밀이 은밀하게 알려지는 과정을 따라 흐르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엔 엄마만 알던 비밀이 딸에게 알려진다. 딸이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엄마는 모른다. 그리고 딸의 남자 친구는 이 모든 것을 모른다. 그래서 관계는 점점 겹을 더해간다. 민아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영재는 놀이를 하던 중 금을 밟은 민아에게 “너 죽었어.”라고 말한다. 그것은 민아에게는 충격을, 영재에게는 재미를 준다. 비밀은 이런 식으로 둘 사이에 군림한다. 비밀이 더해지고 관계의 겹이 더해짐에 따라 서로에 대한 행동 하나하나는 신호가 되고 기호가 된다. 상대방을 향해 해독할 수 없는 신호와 기호를 보내는 사람들은 두툼한 관계의 겹 속에서 더욱 슬퍼지려 한다.

이 즈음에 이르러 생각하게 되는 것은, 영재의 처지, 즉 상처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상처 있지 않은 존재의 의미이다. 이를 테면, 우리가 사는 세계란 거의 대부분 이런 식이다. 나와 타인과 제삼자는 서로 이름은 통하고 있으되 알 수 없는 상처와 슬픔에 의해 홀로인 존재가 된다. 서로를 향해 읽어낼 수 없는 신호를 보내고,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라 흐르고 흘러 누군가에게 가 닿는다. 그러면 그것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우리 모두가 상처와 슬픔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눈에 포착되는 타인은 상처 있지 않은 사람이다. 때로 나는 타인의 슬픔을 직면하는 순간, 그것이 나에게 전이되지 않기를 기도하기도 한다. 슬픔은 암세포처럼 번지기 마련이니까. 이러한 절대적인 고독의 상황에서, 영화 <...ing>는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다.

<...ing>가 보여주는 해결책은 소소하다. 이를테면, 그것은 자리 바꾸기이다. 가장 슬펐던 자와 그것을 이해하는 자와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서로 자리를 바꾼다. 딸이 엄마가 품고 있던 비밀을 안 순간, 엄마의 자리를 이어 받는다. 엄마는 딸이 자신을 대신해 가장 슬픈 자의 위치에 들어섰다는 것을 모른다. 딸은 더욱 밝아지고, 의욕적으로 남자 친구를 만난다. 영재가 두 모녀의 비밀을 알아챈 순간, 영재는 가장 슬프게 될 사람의 위치에 들어선다. 민아가 말하듯,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사랑에 미쳐가지고” 살게 될 영재의 잔상은 민아의 학교 앞에서 비를 맞으며 울고 있는 한 남자와 겹친다. 그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를 쓰다듬는다. 여기에 슬픔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은 없다. 다만 내가 가장 아픈 자리에 가겠다는 각오들이 모여 슬픔과 고통의 지형을 바꾸어 놓는다. 슬픔을 물리치기 위해 싸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미 이들에겐 민아의 죽음이라고 하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했던 순간들을 기억해내고, 슬픔을 삶의 한 단면으로 받아들였다는 성숙이 이들을 한 뼘 더 자라게 한다. 성숙은 의미가 있다.

그러니 타인에게 감사할 일이다. 어느 시인은 세상에 연탄재 같은 이가 없음을 걱정할는지 몰라도, 어찌보면 세상엔 너무나 많은 연탄재가 있다. 연탄 가루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