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보실 영화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2003년 작품으로, 니콜키드먼이 열연했던 <도그빌>입니다. 라스 폰 트리에나 <도그빌>이라는 이름이 좀 낯설다면, <백치들> <어둠 속의 댄서> <킹덤> <유로파>와 같은 영화를 떠올리시면 되겠습니다. 요즘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오 마이 보스>가 상영 중이죠.


록키산맥의 외진 곳에 ‘도그빌’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습니다. 어느 날 밤, 이 마을에 커다란 총소리와 함께 그레이스라는 여성이 숨어들어옵니다. 빼어난 미모의 그레이스는, 대번에 톰의 눈에 들어옵니다. 그레이스는 톰의 안내로 마을 사람들에게 소개를 받게 되죠. 그레이스에겐 어딘가 머무를 곳이 필요한데요,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레이스를 이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톰의 도움으로, 어딘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그레이스는 마을의 총회를 거쳐 이 마을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마을에서 하지 않아도 될 법한 일들을 그레이스가 대신 하기로 한 것이죠. 2주 동안, 그레이스는 이 마을에 필요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레이스에게 친절하고 그레이스는 행복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에 경찰이 찾아옵니다. 그레이스를 찾던 경찰은 동네 곳곳에 현상 포스터를 붙여 놓고 사라집니다. 그레이스가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서서히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돌변하기 시작합니다. 불친절을 넘어선 학대가 시작되는 것이죠. 이 학대와 수탈은 우발적인 어떤 것이 아닙니다. 무척 집단적이며 체계적인 억압과 수탈 속에서 그레이스는 탈출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마을 사람들은 그레이스에게 커다란 개목걸이를 채우고 감금합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애초에 그레이스를 쫓던 갱단에게 그레이스를 팔아넘기기로 결정합니다. 이하 줄거리는 생략....

니콜키드먼의 포스!

영화는 이른바 ‘신의 시점’이라고 부르는 극부감으로 시작합니다. 극부감이란 수직 위에서 바라보는 시점을 말하는데요, 그 시선이 신의 시선과 같다 해서 신의 시점이라 불립니다. ‘신의 시점’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모세’라는 이름의 개입니다. ‘모세’.. 영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성서의 모티브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잔혹한 심판, 그레이스의 수난 등이 그런 코드들이죠. 그런데 성서의 모티브를 차용하는 이 영화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신에 대한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것입니다. 이 영화는 상영된 후에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요, 논란의 중심에 있는 것은 ‘그레이스의 복수’였습니다. 그레이스는 이 마을에 들어와 마을을 “살만한 곳으로 바꾸어”준 존재이면서도 어느 순간 이 마을에서 가혹한 수난을 당하고 종국에는 이 마을을 학살합니다. 그럼 그레이스는 천사인가요, 악마인가요? 희생자인가요, 가해자인가요? 영화의 중반까지 그레이스는 천사를 닮았고, 영화의 후반부에 그레이스는 악마를 닮았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이, 엄밀히 말하면, 이 마을에 그레이스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이 마을 사람들이 그레이스를 학대할 이유도 없고, 그레이스가 이 마을을 학살할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레이스는 평화로운 마을에 찾아와 좋은 일을 좀 해주는가 싶더니 갑자기 마을 사람들에게 학대를 당하고 곧 이 마을을 학살해버리는 존재인 셈이죠. 이런 그레이스에게 마을 사람들을 학대할 권리라고 하는 것이 있을까, 오히려 그레이스가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이 아닌가 하는 논쟁들이 있었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 영화적인 사건을 마을의 입장에서, 그리고 그레이스의 입장에서 각각 따로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을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 마을에는 분명한 결핍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항할 여력이 없는 타자가 나타났을 때 힘이 있는 집단은 어떤 대응을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입니다. ‘반항할 여력이 없는 타자’, 나의 의지가 일종의 ‘권능’으로 작용할 수 있는 타자, 내가 신처럼 군림할 수 있는 타자 말입니다. 이런 대상이 나타났을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윤리적 입장, 이러한 타자를 수용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문제입니다.
그레이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집단’ 혹은 ‘권능한 자’ 앞에 서는 개인의 윤리란 어떤 것이어야 할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이, 이 마을에 숨어 들어온 그레이스는 실제로 이 마을에서는 마치 어머니, 혹은 자상한 신처럼 마을 사람들을 대합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희생하며, 타인의 잘못을 자기의 탓으로 돌리죠. 이러한 순교의 이미지는 그레이스라는 여성을 단순한 인간이 아닌 인간 이상의 존재로 만들어냅니다. 그러던 그레이스가 자신에게 이들 모두를 처치할 수 있는 힘과 기회가 주어지자, 결국 이 마을을 학살해버리는 것이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언어상으로 봤을 때 의외로 누군가에게 ‘천사’나 ‘악마’ 등의 초월적 존재의 이미지를 사용하기를 즐겨합니다. 그리고 이런 언어에 길들여져 언어의 대상에게 그런 모습을 기대하게 되기도 하죠. 아마 우리는 그레이스를 천사냐 악마냐의 논점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레이스가 ‘인간으로서’ 걸어야 할 길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힌트를 주는 존재가 있습니다.


영화에서 살아남는 단 하나의 생물체, 그것은 '모세'라는 개입니다. 모세는 그레이스가 배가 너무 고픈 나머지 밥을 훔쳐 먹으려고 했을 때 그것을 막았고, 갱단이 총구를 들이밀었을 때에도 사납게 짖었습니다. 모세는 불쌍한 그레이스에게도 무서운 갱단에게도 결코 자신의 밥을, 자신의 생명을 양도하려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모세가 걸어간 길, 바로 그것이 인간이 걸어야 할 윤리의 '출발점'이 아닌가 합니다. 무조건 용서하고 희생하기 보다는 사납게 권리를 요구하는 것 말입니다. ‘코나투스’라고 했던가요. 누구에게나 억압할 수 없는 최소한도가 있다고 하죠. 무조건 희생하거나 무조건 심판하기 보다는 자신의 정당하지 않은 아픔을 회피하고 삶이 보내는 행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그레이스가 했던 극단의 선택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닌가 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자신들보다 힘이 강한 갱단과 자신들보다 힘이 약한 그레이스 사이에서 동요하듯, 그레이스가 자신을 억압하려든 마을 주민들과 자신에게 힘을 주려던 아버지 사이에서 갈등하듯, 우리는 결코 좁지 않은 삶의 진폭을 경험합니다. 또한 특정한 결단을 내리고 행동을 해야 할 때도 있죠. 가끔은 아주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항상 세상의 일이란 다면적이고 복잡하니까요. 그럴 땐 오히려 최소한을 먼저 생각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내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 우리가 절대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선택이 쉬울 수도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