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수와 만수가 있습니다. 둘은 빌딩 광고판에 페인트 칠을 하는 페인트공입니다. 연봉은 700만원. 하지만 고향 가족들에게는 연봉 7000만 원짜리 대기업에 다닌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둘은 하루 종일 곤돌라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하고 농담 따먹기를 하고 담배를 피고 잠깐 쉬기도 합니다. 칠수는 아버지의 폭력에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가 행방을 알 수 없는 여동생이 걱정이고, 만수는 2000만 원짜리 교통 사고를 낸 택시 기사 형이 걱정입니다. 만수는 ‘에스오일’ 광고 모델 손예진이 예뻐서 좋고, 칠수는 일본에 가서 ‘한 방 크게’ 한 최홍만 형님이 부럽습니다.

그런 둘에게 곤돌라는 현실 속에서 일을 하는 공간이자 꿈을 꾸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칠수가 일본에서 성공한 K1 선수가 된 자신을 그릴 때, 곤돌라는 현실 속의 곤돌라가 아니라 일본의 K1 링 무대가 됩니다. 칠수와 만수가 ‘은행 털면 돈이 얼마나 나올까?’ 라며 즐거운 상상을 할 때, 곤돌라는 또 은행으로 변합니다. 둘은 몇 평 남짓한 곤돌라에서 밥을 먹고, 일을 하고, 꿈을 꿉니다.

왼쪽 만수 역의 진선규, 오른쪽 칠수 역의 박정환

그리고 둘은 일을 마치고 바람이나 쐴 겸 건물 옥상 철탑에 올라갑니다. 일로 쌓인 스트레스를 풀면서 즐거워하다가, 잘못해서 페인트 통을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그 페인트 통 때문에 대형 교통 사고가 나고, 옥상에 있던 둘은 경찰에 의해 투신 자살자들로 오해를 받습니다. 칠수와 만수가 기자, 경찰 등과 대치하게 되면서 쌓여가던 오해는 뜻밖의 결과를 낳습니다.

<칠수와 만수>는 1986년 문성근, 강신일 주연으로 초연되어 1988년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1992년까지 전국에서 십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화제작입니다. 실제 연극은 웃기면서도 찡했고, 올해 본 연극 중에 꼽힐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극장이 꽉 차 앉을 자리를 찾기 힘든 관객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칠수와 만수>가 20 년이 넘는 기간 동안 400 회 넘는 공연을 했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에 칠수와 만수 같은 사람들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로미오와 줄리엣>이 몇 백 년이 지나도 리메이크 되는 것은 가족이 사랑의 장애물이 되는 커플들이 어느 시대에나 있기 때문인 것처럼 말입니다.

고향을 떠나 돈을 벌기 위해 보따리 하나만 들고 온 청년들의 슬픈 삶 이야기. <칠수와 만수>의 설정은 사실, 흔한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설정이 흔한 게 아니라 그 동안 우리 삶이 그만큼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 큰 틀은 건드리지 않고도, 디테일을 영화 <괴물>, 담배 ‘디스’ 값 이야기, 에스 오일 광고 이야기처럼 현대적으로 바꾸자 2000년대의 관객인 저도 어렵지 않게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을 했으니 말입니다. “이 연극의 결말을 관객들이 어떻게 상상하는지와는 별개로, 그 상상이 무엇이든지간에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게 더 슬픈 일이죠.” 칠수 역의 박정환 씨가 인터뷰 중에 하셨던 말입니다.

사회가 썩어야 진정한 예술이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칠수와 만수>와 같은 예술 작품이 장수하는 것도 좋지만, 예술이 아름답기 전에 우리 삶도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칠수가 소원대로 권투 선수대로 살고 만수가 꿈대로 어머니와 형과 함께 작은 동네 슈퍼마켓을 하면서 살 수 있었다면, 이런 연극은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요. 언젠가 <칠수와 만수> 같은 연극이 나오지 않아도 될 날을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