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그것도 소녀, 그것도 동양 소녀, 그것도 북한 소녀, 그것도 가족을 잃고 혼자서 탈북을 감행해야하는 소녀. ‘바리데기’는 아들을 기대했으나 일곱 번째도 딸을 낳자 부모도 버리고 싶은 딸이라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바리데기를 현대로 환생시키면서 황석영은 그녀를 혼자서 탈북을 감행한 소녀로 설정합니다. 우리나라 전통 구비 서사인 <바리데기>는 누구보다 미천한 존재가 무엇보다 고귀한 생명수를 얻어온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미천한 존재가 탈북 소녀라는 황석영의 설정에 공감했습니다.

우선 여자는 어딜 가도 강간이라는 위험에 놓일 가능성이 남자보다 높습니다. 바리데기가 탈북선 안에서 보는 집단 강간은 지옥도에 가깝습니다. 여자 중에서도 소녀는 체력적으로도 약하죠. 그리고 소녀 중에서도 대기근 시절의 북한 소녀입니다. 다이어트로 고민하는 우리나라나 선진국 소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처참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리데기가 런던으로 탈출하여 그곳에서 불법 체류자로 삶을 꾸려가는 이야기를 따라가자 그녀의 얼굴 위로 내가 아는 얼굴들이 겹쳐졌습니다. 바리데기의 배고픈 얼굴은 한국전 후 우리의 모습 같기도 하고, 60·70년대 독일 등지로 파견 노동을 간 여성들의 모습 같기도 하고, 현재 우리나라의 이주 노동자들의 얼굴 같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바리데기>를 읽는 과정은 혼란스러웠습니다. 바리데기의 조국에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선진국으로 뛰쳐나가고 나의 나라로는 살기 위해 사람들이 밀입국합니다. 역사 교과서에서나 본 6·25 직후 깡마른 사람들의 모습이 2000년대의 바리데기와 그녀 가족의 모습으로 환생했습니다.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먼 유럽으로 떠나야만 했던 할머니 세대를 조상으로 뒀지만, 2000년대의 대한국민들은 연변 아주머니를 가사 도우미로 씁니다. 그런데 나의 또 다른 동시대인, 북한 사람들은 런던에서 연변 아주머니들이 우리나라에서 하는 일을 합니다. 미천한 소녀가 생명수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세상의 모든 약한 존재들의 얼굴과 마주하게 됩니다.

나는 여자라서 바리데기에게 공감할 수 있지만, 부자나라 국민이라 바리데기의 고통을 모를 것 같기도 한데, 내 나라의 역사는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바리데기와 같은 배고픔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내 나라는 그들의 배고픔에 냉정했습니다. 쓰면서도 정리가 되지 않는 이 복잡한 상황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것, 그것이 <바리데기>의 미덕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의 문제로 들어가면 이 작품의 흡입력은 떨어지는 편입니다. 바리데기에게 생명수는 이 세상에 전쟁과 고통이 넘치는 이유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이슬람인 남편은 행방불명되고,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전부였던 아이를 잃고 바리데기는 이런 고통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괴롭게 성찰합니다. 그리고 바리데기는 “이승의 정의란 늘 반쪽”이며, “신의 슬픔”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결론짓습니다.

바리데기의 모습을 보면서 영화 <밀양>의 주인공 신애가 떠올랐습니다. 아이를 잃고 ‘갑자기 내게 닥쳐온 이 고통의 이유는 무엇인가’를 성찰한다는 점에서 신애와 바리데기는 닮아있습니다. 하지만 <바리데기>가 지나치게 추상적인 결말을 제시하고 있다면, <밀양>은 현실 속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의 원인을 알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꼼꼼히 짚어갑니다. <밀양>은 아들을 죽인 범인에 대해 쉽게 용서를 말하지 않지만, <바리데기>는 결말 부분에 이르러 고통의 의미를 몇 문장으로 성급히 요약해서 보여준다는 인상입니다.

작품 자체가 리얼리즘 소설이 아니라 우화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지독한 리얼리즘 영화 <밀양>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작가도 <바리데기>를 통해 시적 서사를 보여주고 싶었다니, 상징적 결말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전반부에서 바리데기가 겪는 고통이 너무 생생하여 현실적이라면, 그 고통이 해소되는 대목은 그 힘에 미치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결말부의 추상적인 문장들과 비교해 전반부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저를 찔렀던 문장은 이것이었습니다. 두만강만 건너자 사람들이 사경을 헤메고 있는 북한과는 전혀 다른 풍요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걸 보고 바리데기는 말합니다. “나는 나중에 다른 세상으로 가서 수많은 도시들과 찬란한 불빛들과 넘쳐나는 사람들의 활기를 보면서 이들 모두가 우리를 버렸고 모른 척했다는 섭섭하고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저를 포함하여 당신은, 세상의 모든 바리데기를 섭섭하게 만드는 쪽입니까, 그 반대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