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누가 이 길로 가라고 말해주면, 내가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상황이면 좋겠어." 나이가 들수록 진로든 연애든,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이 잦아집니다. 그럴 때마다 그렇게 말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선택은 귀찮다고, 누군가 나에게 내리는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상황이면 좋겠다고.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려 해보지만, 친구가 '복종'이라는 단어까지 입에 올리는 이유를 저도 압니다. 누군가에게 복종했을 때, 책임은 명령을 내린 그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했을 때, 책임은 나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사람들은 자유가 좋다 하지만 저는 복종이 좋아요"라는 한용운 아저씨의 귀여운(?) 시구처럼, 어쩌면 선택은 복종보다 훨씬 불리한 게임인지도 모릅니다. <거짓이 고요할 때>는 그 불리한 게임에 대한 연극입니다.


주인공 한대현은 세상과 타협하기 싫은 화가입니다. 하지만 한대현은 마이너로 남아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만 그리고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과정에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은 또 싫습니다. 자신이 보기엔 탐탁치 않은 전시회를 같이 열자는 큐레이터 친구의 제안 앞에서 한대현은 흔들립니다. 소신대로 살아가느냐, 아니면 성공을 위해 베팅을 하는가?

소신과 성공. 많은 사람들이 이 두 가지 선택항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소신이 내면에서 나오는 소리라면, 성공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소신을 따랐을 때 성공할 수 있다면, 아무도 고민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소신과 세상의 인정은 아주 자주 엇갈립니다. 한대현은 성공을 선택하고, 그때부터 한대현 곁에는 정체 불명의 여자가 나타납니다. 여자는 불쑥불쑥 나타나 스릴러 분위기(!)까지 연출하며 한대현에게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묻습니다. 그녀에게 제 마음대로, '소신'이라는 이름을 붙여보았습니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에 손을 뻗었을 때, 우리가 버린 내면의 무언가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한대현은 성공을 선택한 후, 일련의 대가들을 치룹니다. 인터뷰에서 연출가님은 연극을 통해 한대현의 선택이 옳거나 그르다고 말하기 보다는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어쩔 수 없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세상에는 옳거나 그른 선택이 아니라 그 순간에 할 수밖에 없었던 선택만이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그것에 따른 결과가 따라옵니다. 사람들은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하지만 어쩌면 세상은 선택과 대가, 즉 GIVE AND TAKE 법칙이 질서정연하게 지켜지고 있는 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더 무섭고, 잔인한 걸지도 모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