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팬과 아버지. 잘 어울리지 않는 한 쌍으로 보입니다. 피터팬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한 소년이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소년이 아닌 어른으로 행동하기를 요구 받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어른이 되기를 거부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거부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 머릿속의 아버지는 당신들이 살고 싶은 대로 살기 보다는 살아야만 하는 대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경숙 아버지는 다릅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삽니다. 6`25가 터지자 '나도 데리고 가이소'라고 우는 딸과 아내에게 자신은 피난을 갈 테니 너희는 집을 지키고 있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이 연극의 명대사가 바로 "니들은 둘! 내는 쏠로!" 입니다. 이 대사대로 경숙 아버지는 가족 속에서 아버지로 살기 보다는 혼자 살기를 선택합니다. 꺽꺽이 아저씨에게 자신의 가족을 맡기고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꺽꺽이 아저씨가 아내와 바람이 나도 비난하기보다는 쿨하게 떠나는 쪽을 택합니다. '씨 뿌린 책임(?)'으로 한 곳에 정착하여 자식들을 먹여 살리며 지지고 볶고 사는 것이 전부라고 모두가 믿었던 시대, 그는 그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경숙 아버지가 매정하기만한 인간으로 그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낭만적이고 여성적인 인물로 그려집니다. 전쟁통에서 모든 남자들은 강한 남자로 살아남기만을 요구받았습니다. 하지만 경숙 아버지는 총을 들기보다 장구 치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의 관심사는 모든 남자들에게 주어진 '절대 미션'인 "처자식을 먹여 살려라!"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전쟁 탓에 없어진 나무숲을 그리워하면서 "나무는 사람처럼 복잡하지 않다. 지멋대로 자라도 다 멋있다."라고 중얼대는 섬세한 남자입니다. 사라진 것들을 그리워하는 감성이 있는 남자인 것입니다.

연극은 배우 예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이 연극을 조재현 주연으로 보았다면(이 연극은 더블 캐스팅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경숙 아버지에게서 피터팬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극중 나이보다 실제 나이가 적고, 얼굴선도 고운 김영필님이 연기한 경숙 아버지에는 어른 속 소년의 느낌이 물씬 풍겨났습니다. 그런데 김영필님은 어찌 보면 '에이, 실제 저런 아버지가 있을까' 싶은 캐릭터를 실제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삼아서 연기했다고 하셨습니다.

인터뷰에서 김영필님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현실 속엔 없을 것 같은 남자 경숙 아버지의 모습을 김영필님이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찾아낸 것처럼, 어쩌면 우리 아버지 속에도 피터팬이 숨어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모든 아버지에게 피터팬이 숨어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가족을 위해 총을 들고 돈을 벌기 보다는, 그저 노래를 부르며 현재의 아름다운 것을 즐기고 없어진 아름다운 것을 그리워하는 여린 소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