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무라이’ 혹은 ‘무사도’는 일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키워드가 되곤 한다. 사무라이는 일본의 만화와 영화, 그리고 소설을 통해 몇 번이고 재해석되고 가공되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에 소개되기도 했다. 피와 무술에 굶주린 검귀, 무사로서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무사수업을 떠나는 남자, 혹은 쇼군과 막부에 대한 충성심으로 전장을 누비는 무사와 같은 이미지는 상당히 견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재로 사무라이들의 생활이 어떠했을지 알기는 힘들다. 우리는 일본인도 아니고, 사무라이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야마다 요지 감독의 <황혼의 사무라이>는 무척 흥미로운 인상을 남긴다.

세이베이는 한 작은 성에서 창고지기를 맡고 있는 사무라이다. 그는 50석 정도의 보수를 받고 있는데, 그가 살아가는 모양새로 보건데 그리 넉넉한 살림은 아니다. 보살펴야 할 노모는 치매에 걸려 있고, 두 딸은 본격적으로 집안일을 하기엔 아직 어리다. 아내가 있었는데, 결핵에 걸려 죽었고, 장례식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세이베이는 자신의 칼을 팔아야 했다. 세이베이가 자신의 칼을 팔아 장례비용을 마련했다고 말하는 부분은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사무라이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말과 함께 동조되어 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끌어낸다. 칼을 팔아버린 순간 사무라이로서 세이베이의 혼은 이미 죽었고, 그 전에 이미 시대의 기운은 사무라이를 칼집에 넣어버렸다. 칼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칼의 운명은 뻔한 것이다. 그것은 장식용이 되거나 용광로에 들어가 그나마 쓸모가 있는 부엌칼로 부활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하층 사무라이들은 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녹이 슬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세이베이는 넓게 보면 그러한 무리들 중 한 사람이다. 메이지 유신을 향해 큰 도박을 걸어보지도 못하고, 막부의 끝자락에서 이권을 챙기지도 못한 어정쩡한 상태에서, 그럼에도 성주의 명을 천명으로 여기고 복종하는 습성만을 가지고 있는, 칼날은 빠진 채 칼자루만 남은 사내가 바로 세이베이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이베이의 모습이 사무라이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과 회한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비록 사무라이의 시대는 끝나가지만, 그것이 세이베이의 정신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은 극도로 미미하기 때문이다. 즉 세이베이는 시대의 흐름에 밀려 사라져가는 사무라이의 일원이 되었을 뿐, 그것을 적극적으로 혹은 주도적으로 걱정하고 분노하는 ‘주인공’은 아니다. 대신 세이베이에게 주어진 것은 ‘삶’ 즉 직접적으로 ‘생계’로 번역될 수 있는 삶의 무대이며, 세이베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자기 이름으로 공연되는 이 무대에서 주인공은 되지 못한다. 세이베이에게 사무라이란, 그저 보수가 조금 낮은 직업에 불과한 것이다. 창고에 저장되어 있는 대구포의 양과 저장기간을 기록하는 이들 사무라이들의 모습은 오늘날의 직장인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업무 시간이 끝나면 서로 수고했다고 인사를 나누고 단골 요리집에 새로 온 여종업원을 만나러 가자며 꼬시는 동료들을 뒤에 남기고 세이베이는 언제나 칼퇴근을 한다. 그에게는 보살펴야 할 가족이 있다. 사무라이를 전면에 내세웠음에도 전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세이베이의 직장인 창고와 그의 초막집을 반복적으로 오가는 이 영화는, 두 번의 결투를 통해 당시의 사무라이들이 지녔을 법한 시대에 대한 기시감, 혹은 이질감을 담담하게 드러낸다.

결투를 하기 전, 옷과 머리를 다시 만지는 세이베이!

강변에서 이루어지는 첫 번째 결투에서, 세이베이는 나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난다. 풀샷과 롱샷으로 찍힌 이 결투에서 목숨을 건 사무라이들의 비장미와 엄숙미는 찾아볼 수 없다. 나무 몽둥이를 들고 칼을 든 상대를 이기는 세이베이의 검술에 감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살다 보면 하게 되는 싸움에 하나를 더 얹은 듯한 이 대결을 통해 세이베이의 무술 실력이 소문이 나기 시작하지만, 세이베이는 이러한 상황을 영웅으로서가 아니라 담담한 생활인으로서 받아들인다.
반면 두 번째 결투는 결투다운 긴장감을 가지고 있다. 지금으로 치자면 정리해고를 당한 상급 사무라이와 성주의 명령에 의해 억지로 불려 나온 세이베이의 싸움에서 대화는 칼싸움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하나의 시대가 끝나가고 그것에 의해 버림받는 늙은 사무라이와 그것을 담담하게 미리 경험할 수 있었던 가난한 사무라이의 대화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세이베이의 아버지와 세이베이의 대화, 혹은 세이베이의 스승과 세이베이의 대화처럼 들린다. 이는 서로 다른 계급과 세대에 속해 있는 두 사람의 싸움에서 반드시 지켜내야 할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늙은 상급사무라이와 세이베이, 이 둘은 모두 이 싸움을 통해 꼭 지켜내야 할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 둘이 직접적으로 칼을 부딪히는 장면은 전혀 엉뚱하게 표출된다. 세이베이의 이야기를 나무칼로 자신을 죽이러 왔다는 식으로 이해한 상급 사무라이는 무사로서의 자존심과 무사로서의 피로감 사이에서 분노를 느끼며 칼을 휘두른다. 이는 세이베이에게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이 되어, 결국 둘은 목숨을 건 싸움을 하게 된다. 좁은 집이 지닌 알레고리가 그러하듯 이 둘의 대결은 좁아진 사무라이의 시대에서 버둥거리는 그 이상이 아니다. 도망을 간들 그것은 새로운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방식이 아니므로 좁은 집에서 스스로를 유폐시켰던 상급 사무라이는 결국 그곳에서 사무라이의 생을 마감한다. 그는 결국 사무라이로서의 죽음을 택한 셈이다. 그러나 세이베이는 그를 죽이고 좁은 집의 알레고리를 벗어나 다시 삶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는 상처투성이이지만, 그의 집에는 가족이 있고 사랑이 있다.

영화를 보며 문득 하게 되는 생각은 ‘생활’이란 적지 않은 숭고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영화의 대부분은 사무라이인 세이베이의 생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친구를 만나 낚시를 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는 세이베이의 모습은 시대에 의해 역전된 사무라이의 지위에서 오히려 삶의 정답 같은 것을 보여준다. 생활이란 무한한 반복이며, 끊임없는 퇴적과 풍화를 거쳐 단단해지고 마는 어떤 감동을 지니고 있다. 한 인간의 삶에 격정이 지배하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고, 이것은 한 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자주 세이베이의 집이나 직장에서처럼, 삶에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한다. 그러나 삶, 그리고 생활에는 쓰러질듯 위태로운 것을 버텨내게 하는 무엇이 있다. 삶의 단조로운 규칙과 일상은, 잘 드는 칼을 만들기 위해 서서히 피어오르는 잔불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