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봤자 넌 바나나맨이야.

지구 영웅 전설/박민규

평범한 인간도 영웅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꿈도 꾸지 마.”
슈퍼맨은 한마디로 나의 얘기를 일축했다.
“넌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이야.” 슈퍼맨이 얘기했다.
“그럼 미국인이 될 테야.” 내가 소리쳤다.
“소용없어.” 다시 슈퍼맨이 말을 이었다.
“그런다 해도 넌 백인이 아니니까.”

내 어린 시절은 영웅의 시대였다. TV를 틀면 요일별로 영웅들이 뛰쳐나와 내게 무엇도 걱정하지 말라고 장담했었다. 그러니까 나는 세계의 일은 영웅에게 맡기고, 코나 후비면서 과자 속에 들어 있는 따조에 집착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영웅의 가장 큰 축은 DC 코믹스와 (슈퍼맨 배트맨) 마블코믹스의 (스파이더맨 X맨) 그 몸매 좋은 언니 오빠들과 싸움만 나면 전신 타이즈를 즐겨 입던 파워레인저와 후레시맨이었는데, (부수적으로 지구특공대에게는 환경을 맡기고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외국 거북이나 12간지의 동물들에게 부탁할 수 있었다.) TV를 통해 노출되는 횟수는 일본에서 수입된 그 타이즈 군단의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진 영웅의 기준은 뭐니뭐니해도 슈퍼맨과 배트맨이었다. 합체 기술 없이 혼자 싸우고, 서양인이라 그런지 같은 타이즈를 입어도 더 강해 보였으니까. 영웅이 되려고 타이즈에 헬멧을 입는 애들은 없었지만(웃기려는 것이 아니라면) 망토를 두르는 애들은 꾸준히 있었다.


음악 1 : 후레시맨 주제가

사실 영웅이 필요한 시기가 있다. 바로 난세다. 이 말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그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제에서 눈을 떼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영웅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외환위기가 왔을 때 TV에서는 10분 간격으로 박세리의 골프 장면이 나왔다. FTA협상 당시 각 방송사들은 (기존 편성표를 수정하는 막심한 손해를 감수하고서까지) 김연아와 박태환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내 말은 그들의 노력과 결실이 위대하지 않다거나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고 있으니 그것 참 문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미디어 노출 빈도수를 결정하는 그 배후의 힘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어차피 슈퍼맨도 스파이더맨도 만들어 진 것이 아닌가. 슈퍼국가 태생으로 악당들의 음모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영웅의 이미지는 실상 돈벌이가 되는 곳에는 콜라와 총부터 들이미는 현실 속 미국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준다. 그리고 그 백인 영웅이 가진 거대한 힘의 논리는 우리의 몸 속 깊은 곳에 배출되지 않는 중금속처럼 남는다.

축하해. 이제 자넨 영웅이야. 슈퍼맨이 얘기했다.
이게 현실일까? 내가 소리쳤다.
물론. 다시 슈퍼맨이 말을 이었다.
너의 영혼은 백인이니까.

음악2 : 지구특공대 주제가

껍질은 노랗지만 속은 흰 바나나의 이미지는 지구영웅전설의 주인공인 바나나맨의 이미지와 그대로 연결된다. 그는 우리와 같은 황인종이지만 영혼은 백인이다. 그리하여 그는 영웅- 이라는 이름을 가지는 것이 허락된다. 그러나 영웅이 된 이후에 그가 하는 것은 다른 진짜 영웅들의 잔심부름뿐이다. 그 외에는, 바나나맨 유니폼을 입고 포즈를 취해보이며 혼자 뿌듯해 하는 것 정도. (마치 ‘한국’ 그 자체 아닌가.)

당신의 영혼은 무슨 색인가. 당신의 피부색과 일치하는가? 아니면 당신의 영웅이 가진 피부색과 일치하는가? 이 글로벌한 국제화 시대에 대체 무슨 촌스러운 질문이냐고 코웃음치는 당신에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 글로벌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라는 부분이다. 뉴요커들의 일상을 보면서 그것이 어쩐지 근사해보이고 따라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처럼, (만일) 아프리카의 젊은이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드라마를 보면서도 그것을 근사하게 받아들일까? 풍요로움의 차이를 떠나서 우리의 기준은 범지구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영웅의 규정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이미 결정되어 있는 듯하다.

평화롭게 영어 강사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바나나맨에게 어느 날 슈퍼맨이 다시 나타난다.


“새로운 적들이 나타났어.”
“어떤 놈들인데?”
“제3세계 민족주의라는 놈들이야”
“제3세계 민족주의? 맙소사, 1세계도 아니고 2세계도 아니고 제3세계라고? 벌써 이름부터가 공산당만큼이나 나쁜 놈들일 것 같네.”
“그렇지?”
“응.”
“딴 건 필요 없고 열심히 응원이나 해.”
“물론.”
…

왠지 모르게 나는 그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슈퍼맨이 가는 방향으로, 마침 새벽의 어둠 속에선 그 어떤 길도 보이지 않았고, 그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음악3 : 슈퍼맨 리턴스ost main tit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