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네트 'Sound of Books' 뭘 또 봤네, 관악선녀 - 작가 배나은-

기생수/이와키 히토시

길에서 만나 알게 된 동물이 다음날 죽어있었다. 그럴 때면 왜 슬퍼지는 걸까?

기생수는 1989년부터 1995년까지 총 64화(단행본 10권) 잡지 애프터눈에 연재된 만화로 작가 이와키 히토시는 이 만화를 통해 1993년 고단샤 만화상을 수상했다. 작가 스스로 말하듯, 이 작품이 최초로 연재될 무렵에는 생태주의적 관점이라는 것이 그다지 논의 되는 시점이 아니었다.



그대는 만물의 영장. 무엇이든 먹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동안 당신이 생존하기 위해 먹어치운 것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자. 단순히 요리 된 음식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본질을 생각하면서. 문화나 정치, 건강상의 이유로 터부시되는 몇 가지 종을 제외하고. 우리는 정말로 대부분의 것을 ‘먹이’로 삼고 있다. 인간의 방식으로 문명화 된 세계 속에서 우리는 모든 생물의 천적으로서(혹은 그 가능성을 가지고) 그야말로 먹이사슬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 있다. 천하무적인 셈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안심하며 우리가 잠든 사이, 이와키 히토시는 어디에선가 작은 홀씨를 날린다. 그리고 그 홀씨는 당신의 집 앞 마당에 떨어진다.

이 종을 잡아먹어라
홀씨를 찢고 기생생물이 나온다. 우아하게 귀나 콧구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다. 일단 몸 안으로 들어간 기생수는 뇌를 먹어치우고 당신의 육체를 장악한다. 그 순간부터 당신과 나 사이에 ‘우리’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뇌를 먹힌 당신은 이제 완전히 새로운 종으로 기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의 식생활은 보다 심플해진다. 인간을, 먹게 될 것이므로. 개에 들어간 기생 생물은 개를 주식으로 한다. 인간에 들어간 기생 생물은 인간을 주식으로 한다. 자신이 기생하는 종을 먹어치우는 이 기묘한 식성을 가진 새로운 생물의 식사는 인간 사회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피라미드의 서열이 바뀐 것이다. 이제 인간 역시 다른 종에 의해 먹힐 수 있다. 그대, 아직도 잠이 오는가?



종이 다른 나의 오른손
주인공인 신이치는 잠결에 전깃줄로 팔을 동여맨 덕분에 기생생물이 뇌까지 올라가지 못해 뇌 대신 오른쪽 손이(오른손이라 부르게 된다.) 기생 생물로 변한다. 자신의 오른팔이 천적인 생물이 되어 버린 이 기묘한 동거로 인해 신이치는 기생생물과 인간 사이의 중간자로서 고뇌하기 시작한다. 인간으로서 당연했던 것들이 이 새로운 생물에게는 당연하지 않다. 오른손이가 주장하는 약육강식의 논리 역시 신이치에게 거부감을 일으킨다. 그러는 사이 이 두 개체는 서로에게 물리적으로 정서적으로 동화 ․ 절충되어 간다.

다시 피라미드 최상층으로

기생수 오른쪽이와 공생하고 인간성마저 변하게 되는...

어쨌거나 어디선가 갑자기 천적이 나타나긴 했지만, 걱정 마시라. 우리가 누군가. 사자를 우리 안에 가두고 곰에게 서커스를 시키다 간과 발바닥을 먹어치우는 강인한 종이 아닌가. 기생 생물이 사회적으로 진화하는 사이, 인간은 더 빠르게 대처 방법을 찾아 내 그들을 박멸할 준비를 마치고 기생 생물 학살을 일정 부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기생 생물들이 죽고, 살아남은 기생 생물들 역시 야성을 버리고 인간 사회에 흡수된다. (야성을 가진) 마지막 기생 생물 역시 몰래 버려진 산업 폐기물에서 나온 쇠막대에 찔려 그 독소로 인해 죽어간다. 그렇다면 작가인 이와키 히토시는 이 작품을 통해 ‘이것 보시라. 우리에겐 적이 없다. 으하하!’ 하고 호쾌하게 웃고 싶었던 것일까?

생명의 기준
마지막 순간이다. 최강이었던 마지막 기생 생물이 죽어가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다. 흩어진 신체의 파편이 살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다. 그대로 두고 본다면 완전히 재생 될 가능성도 있다. 그 앞에서 신이치는 고민한다.
누가 정하지? 인간과 그 밖의 생명의 기준은 누가 정해주는데? 죽이기 싫다… 솔직히…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생물을 어떻게 죽여…. 인간에게 해롭다고 그 생물에게 살 권리가 없다는 건가? 그러나 하늘에 맡긴 채 돌아서려던 신이치는 다시 칼을 쥔다. 여기서 신이치의 얼굴을 한 작가가 말한다. "나는 보잘것없는 한 마리 인간일 뿐이야. 기껏 나의 가족을 지킬 정도의…"

공생
이 만화 속에서 작가는 환경 운동가나 사상가로서의 목소리를 내고 있지는 않다. 그나마 내고 있는 목소리조차 단일한 시각이 아니다. 신이치와 오른쪽이. 타무라 레이코와 고토.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는 각자의 입장에서 가장 적합한 논리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의 신분으로 ‘어리석은 인간이여!’하고 외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서로 기대어 살고자 하는 신이치의 인간으로서의 논리가 정답인걸까? (그 논리에 따르면 앞서 우리가 먹어치운 모든 생물들에게는 고마운 마음을 가지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인간이 잡식 동물인 것을.)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길에서 만나 알게 된 동물이 다음날 죽어있었다.
그럴 때면 왜 슬퍼지는 걸까?

그건 인간이 그렇게 한가한 동물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게 바로 인간이 지닌 최대의 강점이라구.
마음에 여유가 있는 생물, 이 얼마나 멋진 일이야!"

방송 : 2007년 3월 31일 일요일 오후 7시 뮤직네트 Sound of Bo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