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위대한 점 중 한 가지는, 그가 계급투쟁을 생각해냈다는 점이다. 계급투쟁에 대한 인식이 놀라운 이유는, 계급투쟁이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서 하부구조로서의 경제와 상부구조로서의 정치 사이에 단락(short circuit : 회로 상에서 전위차가 있는 두 부위의 접촉)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생산관계에서 발생하는 착취가 해결되지 않고 축적될 경우, 갈등의 축적이 폭발을 일으켜 상부구조가 변화되고 결과적으로 생산 양식이 총적으로 재구성될 것임을 논증해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여하한 판단, 혹은 호불호의 감정을 갖기 전에, 우리는 이 지점에 대해 고민해봄직 하다. 모순의 누적이 한 사회에 미치게 될 영향과 폭발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사회와 개인이 위기에 처하기 때문이다.

켄 로치 감독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단순히 사회 하층민의 삶을 대변하는 영화를 만들기 때문만이 아니다. 또 그가 소수의 혁명론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가 단순히 그 자신이 열렬한 혁명의 신봉자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한마디로 그의 영화는 포퓰리즘을 자극하는 유치한 선동영화(propaganda)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영화는 선동(propaganda)을 배제하고 언제나 토론을 제기한다. 그리고 하나의 국면이 형성되는 과정을 철저하게 고증하고 체계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기득권과 사회적 지위 모든 것을 원점의 자리에 놓고 사고한다. 자신의 조국 영국에 대항하는 IRA의 투쟁사를 그린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보라. 이 영화에서 그는 단순히 IRA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이유와 과정을 체계적으로 드러낸 바 있다. 만약 이 세계에 어떤 ‘건강한 편향’이 있다면, 그것은 켄 로치의 영화 과정과 비슷한 어떤 것일 가능성이 크다.

켄 로치의 2007년작 <자유로운 세계>가 9월 25일 개봉했다. 9월 위기설이 정점과 봉합과 재점화의 기로에 섰던 그 주에 <자유로운 세계>가 개봉했다. 우리가 몇 개의 개념을 통해 신자유주의를 분석하고 다시 몇 개의 분석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위기에 대해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러한 언술들이 <자유로운 세계>가 포착하는 생산 관계에서의 구체성을 획득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하나의 선동적인 위기론으로만 끝나고 말 뿐, ‘단락’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는 못할 것이다.

영화 <자유로운 세계>가 포착하는 것은 ‘피착취자의 착취자로의 전환’ 과정이다. 계약직 사원이던 싱글맘 앤지가 성추행에 항의했다는 이유로 부당해고를 당한다. 서른 번이 넘도록 계약직 사원으로 직장을 전전했던 앤지는 더 이상 직장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친구 로즈와 인력사무소를 차린다. 늘씬하고 날쌘 여성 오토바이 라이더를 상징으로 내세운 이 업체는, 당연히 무허가 업체다. 그러나 욕을 할 수만은 없다. 비록 불법사업체라고 하지만, 앤지의 입장에서 이 회사는 비실비실했던 자신의 삶을 보상받고, 그녀와 아들의 미래에 밝은 빛을 드리울 수 있는 전환점이기 때문이다. 서른 번이 넘는 이직을 통해 앤지는 이 사회에서 계약직 직원은 결국 이용만 당하다 소용이 끝나면 폐기된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녀가 머리를 굴려 얻은 생존법은 자기 스스로가 사용자의 위치가 되는 것이다. 자신보다 더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민자들)을 이용할 수 있는 사용자가 되는 것이 반복학습을 통해 찾아낸 정답이다. 영화는 앤지가 몇 차례에 걸쳐 무리수를 두며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려다 결국 지키고자 했던 것들을 체계적으로 잃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인간 앤지, 엄마 앤지, 딸 앤지, 연인 앤지, 친구 앤지는 사라지고 빚과 악만 가진 ‘쫓기는 사용자’ 앤지만 남게 된다. 영화는 ‘앤지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라는 질문을 하기 전에 끝나고 만다. 앤지를 동정할 여지 따윈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현실이다.

앞서 마르크스가 위대했던 것처럼 켄 로치도 위대하다. 켄 로치의 영화는 환상에 둘러싸인 세계와 현실 사이의 단락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환상의 세계는 이 세계가 자유의 세계라고 말한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세계가 이 세계의 축복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환상일 수도 있고 근대의 맹목적 낙관일 수도 있으며 중심부의 자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러한 환상의 지속이 아니라, 편중된 풍요 속에서 끊임없이 포착되는 위기의 징후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는 고민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앤지가 당하게 되는 테러는, 단순히 불법이주를 통제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회에서 발생하는 위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불평등과 차별이 사라지거나 수정되지 않는 한, 필연적으로 통제의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자유로운 세계>에서 앤지의 아버지가 앤지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과거에 ‘너 하나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는 질문은, 봉사와 온정에 대한 도덕적이며 당위적인 요구였다. 그러나 전 지구/지역의 생산과 소비가 무척 기민하게 연결되고 모든 이동의 속도가 빨라진 지금, 같은 질문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부의 실체와 형성과정에 대한 성찰이 결여된다면 국가적이며 세계적인 위기의 점증을 막을 길이 없고, 우리는 전과는 비교 할 수 없이 빠른 시간 안에 그것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우리를 ‘쫓고 있는’ 추적자는 우리와 발전의 속도를 놓고 경쟁하는 개발도상국이 아니라,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면서 폭주하는 우리 자신인 것이다. 우리가 달리기 위해 깔아 놓은 레일 아래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폭주는 자멸로 끝나고 말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출근길 어디에선가 시위를 하고 파업을 벌이고 있는 하청 노동자들, 여성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외국인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우리의 일상을 침범하는 소음이 아니라, 이 사회에 대한 경종이다.

상황은 비관적이나, 세계를 비관할 필요는 없다. 섣부른 비관은 엉터리 회의주의와 냉소를 낳을 뿐이다. 세계를 살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의지와 낙관과 행동이, 진실로 세계를 전진시킨다. 72세 켄 로치도 아직 세계를 비관하고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