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낯설지만 우울한 질문이다. 개에게 쫓기며 어두운 밤거리를 헤매는 배트맨이 돌아갈 곳은 어디인가? 답은 웨인의 펜트하우스다. 배트맨이 고담의 시민들에게 악의 축으로 평생 욕을 먹더라도, 웨인은 그만의 펜트하우스에서 파티를 열고 러시아 발레단과 요트놀이를 즐길 수 있다. 악역을 자처한 배트맨, 사실은 엄마 친구 아들이다. 이탈리아의 한 언론가는 이런 말을 했다. 미국의 통조림은 맛있게 먹더라도, 그 이데올로기는 접시에 버려둘 것이라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를 본 내 소감도 이와 비슷하다. 그와 같은 영화를 만든 것에 무척 놀라게 되지만, 그런 영화가 함축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더 놀라게 된다.

<배트맨 비긴스>는 말 그대로 시작을 알리는 영화였다. 배트맨은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가와 그리고 왜 출현해야만 했는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의미심장했던 부분은 웨인의 여자친구 레이첼과 웨인의 대화였다. 악에 대한 복수와 정의의 차이는 무엇인가? 악이 활개하고 다닐 때 그것을 처단하지 못하는 법에 호소하는 것이 정의인가? 도대체 악을 응징하는 복수와 정의가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질문에 레이첼은 대답한다. 정의는 조화다. 이것은 악을 응징하는 정의를 자처하는 배트맨이 가슴 속에 담아두어야 할 일종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 사적 처벌을 넘어서는 공적 처벌의 실현은 그것이 조화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존중될 필요가 있다. 정의가 얻어야 할 것은 악의 섬멸이 아니라 악과의 균형이다.

<다크나이트>의 시작은 이 지점이다. 악과의 균형을 이루어야 할 정의가 방대하게 커졌다. 배트맨은 어둠 속에서 경찰을 돕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사실은 경찰을 지휘하거나 무시하고 있는 무법자 영웅이다. 그가 무법행위를 저지를수록 그는 영웅이 되어간다. 그가 영웅의 정점에 올랐을 때 그와 균형을 이룰 악, 조커가 등장한다. 그리고 투페이스가 등장한다. 배트맨과 조커는 극단적으로 정의와 악을 대변한다. 차이가 있다면, 조커는 전능하다는 점이다. 영화의 모든 장면에서 조커는 결과만을 보여준다. 즉 영화에서 조커가 어떤 일을 꾸미는 과정은 나오지 않는다. 처음의 시퀀스에서 어떻게 악당들을 끌어 모았는지, 병원에 어떻게 폭탄을 설치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조커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있고, 해냈다. 배트맨의 등장에 대해 한 편의 영화를 소모하면서까지 드러내려고 했던 것과는 달리, 조커는 그냥 조커일 뿐이다. 심지어는 그를 식별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고담에 남아 있지 않다. 과정 없는 결과, 그냥 그렇게 존재하게 된 존재를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조커가 신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무엇인가를 전능하게 관장하는 이이며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가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 보듯 하찮게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배트맨과 조커의 기나긴 싸움이 시작된다. 배트맨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그것이 비록 악인이라 하더라도. 조커는 그것이 불만이다. 자신을 이 세계로 소환시킨 배트맨이 보여주는 것이 ‘공포’에 불과하다는 사실 말이다. 모든 악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려고 하면서 가장 공포스러운 존재가 되기는 회피하는 기회주의, 즉 위선을 딛고 배트맨은 영웅이 되었다. 궁극적으로 배트맨이 어떻게 스스로를 포장하더라도 그는 조커와 다를 바가 없다. 고담시의 사람들을 모르모트로 삼아서 자신의 정의관을 시험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해서 고담시의 죄수들과 시민들이 두 배에 실려서 각자의 정의에 대해 실험당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승자는 배트맨이다. 별로 시민과 죄수들을 믿지 않는 배트맨이지만 이상하게도 이 순간에는 시민과 죄수들을 믿었다. 이 믿음의 근거를 영화 속에서 찾기는 어렵다. 조커가 이들의 정의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배트맨이 믿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배트맨과 조커와의 대결을 통해 배트맨이 얻게 된 교훈이 있을까?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배트맨은 조커와의 대결을 경험하고 투페이스의 죽음을 목격한 후, 결국 스스로 신이 되었다. 그는 순교를 자처했다. ‘모든 죄를 뒤집어 쓴’ 배트맨은 성서에 등장했던 누군가를 닮았다. 어두운 거리로 사라져가는 배트맨을 바라보며 고든이 ‘구원자’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제 그에게는 고난이 따라올 것이다. 물론 배트맨 가면을 쓰고 있을 때뿐이다. 가면을 벗으면 그는 웨인 그룹의 총수이면서 펜트하우스의 꼭대기에 살고 고담시는 웨인그룹에 대한 세무감사 따위에는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침해받지 않는 권력이었다. 우습지도 않은 순교를 통해 배트맨은 단순한 영웅에서 신의 위치로 급부상한다. 투페이스의 변신과 죽음이 시민적 정의감의 죽음으로 비화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사고방식이야 말로 계몽의식과 선민의식의 극단적인 표출이다. 투페이스가 시민이 가지고 있는 정의의 힘을 상징한다는 그런 공식이야 말로 시민적 정의의 가능성을 조롱하는 계몽의식인 것이다. 투페이스의 오류도 시민이 감당하고 딛고 일어서야 할 하나의 계기에 불과하다. 투페이스의 오류를 시민의 실패로 귀결 짓는 저 앙상한 논리는 <배트맨 비긴스>에서 시작되었던 정의에 대한 토론을 어색하게 만든다.

근대적 국가의 출현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계몽된 인간을 전제로 한다. 신이나 왕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를 유지하고 지속시켜나갈 수 있는 주체의 등장이 근대적 국가의 전제이다. 사회 계약을 괜히 맺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근대적 주체가 언제나 이론에 부합하는 이상적인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국가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근대국가의 발전은 이러한 위기를 시민의 힘으로 이겨나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예를 들어 몇 번의 선거를 거치며 독재자를 뽑더라도 그것이 시민의 선택이라면 존중된다. 왜냐하면 독재자가 옳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몇 번의 과정을 거쳐 시민들이 점차 독재자를 구별할 수 있게 되고 언젠가 제대로 된 대표를 뽑을 수 있게 되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시민이 용납할 수 없는 독재자라면, 시민은 그들의 힘으로 독재자를 몰아낼 수 있다. 그것이 근대적 국가와 근대 이후의 사회에 대한 일종의 믿음이다. 신이 사라진 자리에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한 규칙과 질서를 부여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 그것이 근대의 사회다. 그러나 이런 근대사회의 발전은 당연히 더딜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몇 번의 오류와 훈련을 반복해서 거쳐야 하고, 이런 과정을 거친다 하더라도 시민들의 정치적 각성이 찾아올 것이라는 확증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이른바 계몽적인 선민의식으로 무장한 지도자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자신들이 시민을 지휘해 올바른 길로 나아가겠다고 이야기하고, 가끔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시민들에게 불편을 가중시키고 자신과 다른 길을 가려는 시민들에겐 벌을 내린다. 물론 이러한 지도자의 등장도 시민의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시민의 입장에서 현재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을 필요로 할 때 이런 지도자가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지도자는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부과된 힘이 매우 한시적인 것에 불과하고 그것은 맡겨진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익히 경험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권력을 자신의 소유물로 착각을 하곤 한다. 그래서 언제나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고담시에는 그런 것이 없지만 언론의 역할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배트맨과 조커가 믿고 있지 않지만 시민이 지니고 있는 반성적 이성과 사유력 같은 것 말이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이런 배트맨십과 조커맨십을 가진 사람들이 이 나라에도 참 많이 있다. 촛불을 들고 나온 시민들을 잡아 가두기에 여념이 없는 오만한 계몽의식은 조커나 배트맨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도 스스로 악역을 자처했다고 생각하고, 욕을 좀 먹더라도 순교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임기가 끝나면 자신만의 펜트하우스로 돌아갈 것이다. 가끔 펜트하우스 대신 감옥에 가는 사람도 있지만, 광복절 같은 날 대개 펜트하우스로 돌아가게 된다.

일반적인 공식대로라면, 스스로 신의 위치에 오른 배트맨이 걷게 될 길은 몰락과 반성이다. 그리고 인간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만약 3탄이 나온다면 어쨌든 배트맨이 몰락의 길에 일정 분량이 할애될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다만 배트맨이 제대로 반성을 하길 바랄 뿐이다. 몰락을 겪어보고도 반성하지 않으면 누구처럼 미움 받게 된다. 그런 미움의 순간에 자신을 순교자라고 생각하면, 그와는 어떠한 대화도 불가능하다. 순교자의 특징은 순교를 하면 할수록 순교자가 된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