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하다 싶을 때, 혼자 하는 놀이가 있다. 어떤 배역을 상상하고, 그 배역에 가장 어울리는 배우가 누구일까 생각해보는, 백년이든 천년이든 혼자 놀 수는 있지만, 절대 돈은 되지 않을 그런 놀이다. 그 반대도 가능하다. 어떤 배우를 생각해보고, 그 배우에게 가장 어울리는 역할이 무엇일까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영화를 보는 커다란 재미 중 하나는, 개인적으로 가장 큰 재미는,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것이다. 시나리오가 아무리 좋고 촬영과 미술에 공을 들였어도 일단 배우가 연기를 못하면 민망해서 영화를 못 보겠다. 반대로 정확한 배역에 정확하게 캐스팅 된 배우들의 정확한 연기를 지켜보는 것은 정말 즐겁다. 이런 의미에서 데이빗 맥킨지 감독의 <할람 포>는 대단히 기분 좋은 영화였다. 당연히, <빌리 엘리어트>의 제이미 벨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이미 벨은 올해로 23세 청년이 되었고, 그의 연기를 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르튀르 랭보가 떠올랐다. 제이미 벨이라면 랭보를 연기할 수 있겠다는, 다소 영화와는 무관한 ‘결론’을 내렸다.

영화 <할람 포>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얘기를 하나 더 하자면, 문득 한국에서 <할람 포>와 같은 영화가 제작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할람 포>가 엄청나게 좋은 영화라는 의미에서의 언급이 아니다. 익숙하지 않고 낯선 영화에 대한 한국영화계의 대응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엔 연기를 잘 하는 배우도 많고, 재능 있는 연출자도 많고, 능력 있는 스텝들도 많다. 하지만 기괴하면서도 정신적으로 선정적인 이 영화에 투자하려는 자본이 있을까, 이런 영화를 찾아볼 관객들이 있을까, 이런 영화를 장기적으로 상영할 극장이 있을까는 의문이다. 당연히, 올 한 해 상영되었던 한국 영화들의 목록을 떠올리는 중이다. 영화의 역사는 길지 않고, 그 사이에 언제나 영화는 산업과 예술 사이에서 아슬아슬하지 않은 줄타기를 시도해왔다. 나의 걱정은, 모든 영화와 관객들이 예술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지 않다. 그저 이 아슬아슬하지 않았던 줄타기, 그나마 볼만했던 곡예마저 끝나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은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할람 포>의 할람 포는 ‘용기’가 필요할 때마다, 어머니가 남기고 간 화장품과 옷을 이용해 원시시대 전사와 같은 분장을 한다. 얼굴과 가슴에 붉은 립스틱으로 그림을 그리고 적을 향해 돌진한다. 할람 포는 어머니의 옷을 입고, 어머니가 남기고 간 물품들을 만지며 삶을 소진한다. 같은 동네의 동년배들이 할람 포의 오두막에 쳐들어와 어머니의 사진에 낙서를 했을 때, 낙서가 된 부분을 모두 찢어내고 남은 것은 할람 포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이다. 노골적이게도 할람 포는 어머니에 의해, 정확히는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에 의해 감시받는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영화는 할람 포의 어머니가 어떤 여성이었는지, 할람 포와 어떤 잊지 못할 추억이 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은 상당히 그럴 듯한 설정이라고 여겨진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대부분의 상실감에는, 분명 기원이 없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상실했다는 그 자체를 끊임없이 환기해낼 뿐, 그 무엇의 실체가 대관절 무엇이었던가에 대해서는 쉽게 생각해내거나 설명해내지 못한다. 그런 와중에 떠오르는 해결책이란 것은 무척 단순해지기 십상이다. 가난했던 시절에서 상처를 받았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사랑했던 이와 헤어졌다면 다른 이를 만나야 한다. 어머니를 잃은 할람 포는, 신비롭게도 어머니와 꼭 닮은 여성을 만나게 된다. 물론, 이와 같은, 입에는 입 눈에는 눈 식의 접근은 상실감에 대한 적절한 답이 아니다. 고통을 잊기 위해 투여되는 진통제란, 일시적으로 고통을 잊게 하지만 동시에 중독성이 강하고 근원적인 고통을 외면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할람 포의 어머니를 빼다 박았던 케이트와 할람 포의 마지막 대화는 남기는 여운이 짙다. 자기를 찾아온 할람 포에게 케이트는 5년 후에 찾아오라고 말한다. 할람 포는 그 때도 아름다울 것이냐고 묻고, 케이트는 그러길 바란다고 대답한다. 물론 5년 후에 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지, 심지어 만나기는 할 것인지도 장담할 수 없다. 다만 5년이라는 시간은 밖에서 답을 구하던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시간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를 잃고, 케이트와 이별하기까지 할람 포는 늘 ‘보는’ 사람이었다. 나무 위의 오두막이나 호텔의 시계탑에서 망원경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관음했다. 어머니가 살해되었으리라는 스스로의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 새어머니를 관찰하고 어머니가 죽었던 장소를 떠돌았다. 이제 할람 포에게는 다른 맥락이 필요하다. 망원경을 버리고, 자신의 주위를 관찰하며 떠돌던 시선을 버리고 온전히 스스로의 삶을 향해 걸어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관음과 관찰의 행위는 사실 어머니의 상실감에서 기인했었다는 그 맥락을 인정하고 다른 맥락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호텔에서 할람 포에게 행복감을 줬던 것은, 단지 케이트와 함께 일을 해서만은 아니었다. 다들 기피하는 일이지만 주방 보조를 하며 일에 몰두하고, 리듬을 타고, 상사의 추천으로 승진까지 하는, 이른바 구체적인 삶의 맥락을 스스로의 삶에 받아들이며 할람 포는 조금씩 행복해졌던 것이다.

우여곡절을 거쳐, 할람 포는 어머니의 장식물에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를 무장할 수 있는 전사가 되었다. 신을 만나면 신을 베고, 악마를 만나면 악마를 베며 결국은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연이 살아가는 모든 것에 부여한 ‘성장’이라는 독특한 성격은, 참으로 지독한 선물이다. 어쨌든, 그 덕분에 행복한 것 아닌가.

완소 제이미 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