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영화를 두 편 이상 보는 것은 차라리 고문에 가깝다는 것이 기자의 일관된 소신이다. 소신이라고 하면 거창하지만, 어쨌든 하루에 보는 영화는 한 편 이하로 제한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 영화들도 많지만, 대개 영화를 보고 나면 숙제를 떠안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누가 검사를 하겠다고 나서진 않지만 영화를 보고 생각을 정리해두지 않으면, 숙제가 점점 밀리고 있다는 느낌, 그런 강박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영화제라곤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영화제라고 하면, 왠지 보통 하루에 세 편 정도의 영화는 봐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 비슷한 것이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번 전주 국제 영화제에 방문하면서, 이런 중압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전주는 비교적 한산하고 고즈넉했으며,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 여기 저기 기웃거리며 거닐기에 좋은 도시였다. 특히 영화의 거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만날 수 있는 전주천변은 서울의 청계천과는 사뭇 다른, 자연스러움과 가지런함이 매력적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영화를 보는 시간보다 전주천변과 전주천변 건너에 있는 진북동 일대에서 보냈던 시간이 더 많았다. 뉘엿뉘엿 늙어가는 노인들과 파릇파릇 피어나는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모습에서, 비로소 낯선 땅에 도착했다는 안도감 비슷한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영화의 거리에서 20분 정도 걸어서 도착할 수 있는 한옥마을과 전동성당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한옥마을에 어울리는 콘텐츠를 개발하려는 노력의 흔적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그러니까, 전주 국제 영화제는 이와 같은 편안하고 포근한 분위기에서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이를테면 영화를 보기 위해 외출을 해봄직한 최상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올해로 9회를 맞은 전주 국제 영화제는 프로그램 구성과 진행에 있어, 만만지 않은 내공과 외공을 겸비하고 있었다. 상영작들의 면면을 보자면, 우선 베트남 영화 특별전과 중앙아시아 영화 특별전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벨라타르 회고전과 알렉산더 클루게 회고전도 눈길을 잡는다. 아프리카 감독들에게 메가폰을 맡긴 디지털 삼인삼색 2008은 무척 의미심장한 기회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이 외에도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영화들의 목록을 보노라면, 특히 그 제목들을 보노라면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온다. 영화 외적인 진행에서도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고심하고 노력한 흔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전주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영화의 거리까지, 그리고 다시 전북대까지 셔틀버스가 꾸준히 운행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온 방문객을 위해 보관소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부지런하게 전주 국제 영화제 참여계획을 세운 관객이라면 싼 가격에 전주의 한옥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사랑방에 몸을 뉘여 봤을 것이다. 주차 공간들이 비교적 잘 확보되어 있었고 각종 거리 공연과 부대 행사들이 영화와 영화 사이의 시간을 꽉 채워주었다. 특히 전주 국제 영화제의   자원봉사자들의 친절함과 문제해결 능력은 매우 탁월했다. 관객들의 관람 매너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여전히 엔딩 크레딧이 끝나는 순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는 관객들도 있었지만, 역시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답게 대부분의 관객들은 엔딩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고 박수를 친 후 질서를 잘 지켜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기자는 처음 경험하는 영화제의 분위기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중, 길거리에서 아는 이들을 우연히 몇 마주치고서야 정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안타까운 점은, 기자가 방문했던 기간이 마침 연휴 기간이었고 대부분의 영화들이 매진(!)되어, 선택의 폭이 매우 좁았다는 사실이다. 영화 선택의 폭이 좁았을 뿐만 아니라, 상영관 내에서 좌석 선택의 폭 역시 매우 좁아 대부분의 영화를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서 봐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미리 철저하게 준비를 해가지 못한 기자의 게으름을 탓해야 하겠지만, 일단 그만큼 영화제가 성황리에 치러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한 셈이니 아쉬워할 것만은 아니다.

빨간 표시가 매진표시이다.

<대부>의 감독, 프렌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10년 만에 내놓은 영화, <영원한 젊음 Youth Without Youth>은, 우연히도 기자가 요즘 하고 있는 고민들과 맞닿는, 몇 가지 지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기자의 고민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란 존재가 자기에게 어울리는 언어를 사용하며 자기에게 어울리는 사람과 자기에게 어울리는 시대에서 사는 것이 참 어렵다는 사실에 대한 재확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는, 세상 모든 언어의 기원에 대해, 그러니까 언어의 역사 이전의 언어에 대해 연구하는 도미니크 교수가 어느 날 벼락을 맞고 겪게 되는 이야기이다. 벼락을 맞고 그 영향에 의해 젊음을 되찾게 되는데, 이 벼락은 마치 돈오(갑자기 찾아오는 깨달음)의 순간을 위해 준비된 메피스토의 계약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기자의 경우, 언어를 추적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일단 반가운 마음부터 들게 되는데, 그것은 언어가 결국 인간과 인간 사이의 최종적인 차이를 확인시켜주는 유일한 매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같은 한국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기자와 이 글의 독자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마다의 담화 구조 속에서 언어는 비어있고, 그저 편의상 필요한 것들을 지칭하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과정 속에는 그의 담화 구조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평소 기자의 소신이 이러한데, 극중 도미니크가 베로니카의 고대어 방언들을 해석하는 과정은, 아마 언어를 통해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려는 노력이었다고 생각한다. 언어 속에서 인간은 영원히 방황하고, 언어는 영원히 현실을 대체할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영화의 엔딩신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도미니크와 베로니카의 대화

<스트레인저 ; 무황인담>은 <강철의 연금술사>를 제작한 본즈 사의 최신 극장판 애니메이션이다. 이름을 들어보면 아, 그 애니메이션이라고 탄성을 지를 법한 작품들에서 애니메이터로 활약했던 안도 마사히로가 감독을 맡았다. 이 작품을 보며 <바람의 검심>과 비교를 했던 것은 기자 혼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작품이 <바람의 검심>을 모방했다는 식의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봉인’이라는 설정에 대해 두 작품이 접근하는 방식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는 것이다. <바람의 검심>에서 켄신이 역날검을 사용하고, 결코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며 자신의 검술에 봉인을 가하는 것처럼, <스트레인저 ; 무황인담>의 주인공 무명씨도 검과 칼집을 매듭으로 묶어놓고 검을 뽑지 않는 자기 봉인을 가했다. 당연히 둘은 빼어난 검사이고, 봉인에는 자기 반성의 의미가 있고, 악당들의 도발은 이들이 스스로 봉인을 해제할 구실을 계속해서 마련한다. 기자는 과연 주인공 무명씨가 끝까지 봉인을 지킬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했다. 어떤 정치적 상징을 읽어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기자에게 그 봉인은 전후 일본에게 가해진 연합군의 봉인으로 읽어졌다. 분명 안도 마사히로가 이런 점을 염두에 두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작품을 보는 자로서, 기자는 그런 관점에 서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주인공 무명씨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봉인을 풀어버린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기자는 결국 어떤 명분이 주어진다면, 일본은 언제든 군국주의로 돌아서버릴 수도 있겠다는, 어쩌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답답함 같은 것을 느꼈다. 특히 일본 땅이 외국인들의 전장이 된다는 설정, 그리고 그 싸움에 개입된 주인공도 머리에 검게 물을 들인 외국인이라는 사실은, 마치 탈아입구의 주장이 전제로 삼았던, 약육강식의 세계에 놓인 일본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분명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라고 생각하며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호세 루이스 토레스 레이바 감독의 <하늘, 땅 그리고 비>는 기자가 가장 보고 싶었던 영화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말그대로 하늘과 땅과 비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천지간에 버려진 사물 같은 사람들이 부유하는 먼지처럼 각자의 궤도를 떠도는 모습들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들의 고립감이 서로에 의해 조금씩 보듬어지는 모습에 측은한 마음도 들었다. 두 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사람들이 오고가고, 그들의 자연은 쉼 없이 비를 뿌린다. 사람이 풍경인지, 풍경이 주인공인지 알 수 없는, 서로가 서로를 지워가는 듯한 순간들 속에서 시인 김종삼의 시구가 떠올랐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 사노라면 / 많은 기쁨이 있다고” 영화에 대한 본원적인 기억들, 그러니까 그냥 ‘본다’라는 행위의 원형을 체험할 수 있는 영화였다.

하늘, 땅, 그리고 비

  

<디지털 삼인삼색 2008>은 전주 국제 영화제의 야심찬 기획이다. 영화제가 선정한 세 명의 감독에게 제작비를 지원해주고 어떤 조건도 달지 않은 채 영화를 맡기는, 대단히 파격적인 기획이다. 올해는 아프리카의 감독 삼인에게 메가폰이 맡겨졌다. 이드리사 우에드라오고, 마하마트 살레 하룬, 나세르 케미르 감독은 각각 <생일>, <유산>, <나의 어머니>를 제작했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세 감독들과의 대화의 시간이 주어졌다. <생일>의 아드리사 우에드라오고 감독과 마하마트 살레 하룬 감독은 모두 아프리카에서의 열악한 영화 환경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기 보급률이 높지 않아 영화 상영 자체가 힘들고, 제작은 더더욱 힘든 상황에 대해 관객과 공유가 이루어졌고, 여전히 내전 중인 차드에서 영화를 제작해야 했다는 사정도 알게 되었다. 상당히 힘든 환경임에도 영화는 제작되었는데, <생일>은 형식적으로 원신 원컷 원무비를 실현시켰다. 그리고 분명한 의도, 즉 짧은 영화 한편에 아주 행복한 순간부터 처참한 비극의 순간까지를 모두 담겠다는 의도를 실현시켰다. 한국의 관객들이 봐왔던 기술적으로 완성도 높은 영화에 비하면 극적 긴장감의 조율과 테크닉이 미진해보였지만, <디지털 삼인삼색>의 취지에는 높은 수준에서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우에드라오고 감독에게 만약 영화를 잘 제작할 수 있고, 관객들이 쉽게 영화를 접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은지 질문을 던졌는데, 감독은 일상의 소소한 삶을, 유머와 함께 보여주고 싶다고 얘기했다. 마하마트 살레 하룬 감독의 <유산>은 사막을 가로질러 여행을 떠났지만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돌아온 한 남자가 말을 잃어버린 내용이다. 결국 그는 다시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문득 그가 목적지에 도착해 여행에 성공한다면, 그의 시간과 삶들은 온전히 그의 것이 될 것인가 하고 생각해보게 되었다. 하룬 감독의 전작 중 <다라트>란 작품이 있는데, 우리말로 옮기면 <건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작품 이름에 대한 질문에 하룬 감독은 “우기에는 비가 많이 와서 차량이 못 다니기 때문에 내전이 중단되지만, 건기엔 차량들이 다닐 수 있어서 다시 내전이 시작된다. 그러니까 건기란 곧 내전기란 뜻이다.”라고 대답했다. 세상엔 알아야 할 것이 이렇게 많다. 나세르 케미르 감독의 <나의 어머니>는 현실과 초현실을 오가며 어머니와 자신에 대한 기억들을 담았다. 기술적으로 완성도가 높았고, 기획도 의미심장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업’인 영화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시는데, 그러니까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아들은 어머니의 ‘사전’을 영상으로 만들겠다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는 설정이다. 감독이 직접 주연배우로 출현했다.

지아장커 감독의 <무용 Useless>는 옷에 관한 다큐멘터리이다. 옷을 만들거나 수선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모습을 담았다. 대량 생산 공장에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의 일상, 대량 생산 체제가 앗아간 옷의 본원적 의미를 되찾기 위해 일상복으로는 너무 무거워서 입을 수 없는 옷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의 작업과 인터뷰, 한 탄광지역에서 옷 수선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전직은 재단사였으나 지금은 옷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광부가 된 남자의 인터뷰. 그리고 온 몸에 탄가루를 묻힌 채 몸을 씻는 광부들의 몸을 보게 된다. 옷 한 벌에 함축된 인간적이며 사회적인 관계들과 의미들은 매우 깊은 곳까지 포착된다. 어느 순간에 이르러 한 벌의 옷은,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그 혹은 그녀가 삶에 걸친 어떤 것이 된다. 광부들의 맨 몸에 걸친 검은 탄가루 같은 무엇 말이다.

무용

  

기자가 게을러서 많은 영화를 보지 못했다. 우연히 만난 후배들을 따라 빗길을 나서기도 했고, 혼자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도 한 탓이다. 어쨌든 좋은 영화를 만든 제작진들과, 좋은 영화를 상영해준 영화제 측에 감사의 인사를 덧붙인다. 전주가 고향이라는 친구가 소개해준 시가 있어 전주 국제 영화제 탐방기의 결구를 맺고자 한다.

                           전주(全州)

                                              김 사 인

             자전거를 끌고

             여름 저녁 천변 길을 슬슬 걷는 것은

             다소 상쾌한 일

             둑방 끝 화순집 앞에 닿으면

             찌부둥한 생각들 다 내려놓고

             오모가리탕에 소주 한 홉쯤은 해야 하리

             그러나 슬쩍 피해가고 싶다 오늘은

             물가에 내려가 버들치나 찾아보다가

             취한 척 부러 비틀거리며 돌아간다

             썩 좋다

             저녁빛에 자글거리는 버드나무 잎새들

             풀어해친 앞자락으로 다가드는 매끄러운 바람

             (이런 호사를!)

             발바닥은 땅에 차악 붙는다

             어깨도 허리도 기분이 좋은지 건들거린다

             배도 든든하고 편하다

             뒷골목 그늘 너머로 오종종한 나날들이 어찌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러나 여기는 전주천변

             늦여름, 바람도 물도 말갛고

             길은 자전거를 끌고 가는 버드나무 길

             이런 저녁

             북극성에 사는 친구 하나쯤

             배가 딴딴한 당나귀를 눌러타고 놀러 오지 않을라

             그러면 나는 국일집 지나 황금슈퍼 앞쯤에서 그이를 마중하는 거지

             그는 나귀를 타고 나는 바퀴가 자글자글 소리내며 구르는 자전거를 타고

             껄껄껄껄껄껄 웃으며 교동 언덕 대청 넓은 내 집으로 함께 오르는 거지

             바람 좋은 저녁